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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다 하나씨 Oct 20. 2023

서정의 하노이

" HÀ NỘI LÃNG MẠN 낭만 하노이_에필로그

5800페이지 즈음을 넘기고 있는

하노이의 12월.

스웨터 사이로 은근한 찬바람이 스며들어 걷은 소매를 풀어 내리고 팔을 움츠린다.

크리스마스트리 상점이 늘어선 항마 (Hàng Mã) 거리에는 상인들의 짜증에 눈치를 보면서도

진열된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기 바쁜 베트남 사람들이 북적인다.

2006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하고 싶어도 트리 장식을 파는 곳조차 없었다.

캐럴이 울려 퍼지는 것도 트리장식을 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건조하고 딱딱한 나라였다.

그런데 이렇게 매년 화려해지는 트리의 디자인이 항마 거리를 가득 채워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다니

베트남 개방의 역사를 같이 따라 걷는 느낌이랄까.

 

벽화가 그려져 있는 항마 근처 거리 ⓒ 마틸다 하나씨


베트남의 차로도 골목길도 대부분 가로수 길이다.

가로수 위의 나뭇잎은 여전히 초록인데

나무를 희뿌옇게 감싸 안은 겨울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다.

눈대신 안개가 내려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주곤 하는 이맘때 하노이의 하늘은 자주 희뿌옇다.

White Foggy Christmas라…

뭔가 어색한 조합이 아닌가 싶다가도

그래, 하노이 겨울의 시그니처 안개가 빠지면 그것도 아쉬울 일이지.


한달 내내 해를 보지 못했더니 

안개마저 따듯해져 온다.

아련함으로 한 겹

익숙함으로 한 겹

하노이에 담은 나의 눈물과 나의 웃음을 토닥여 주듯이

쌀쌀한 내 어깨를 안아준다.


그러다 갑자기 오늘도 바짝 마르지 않을 빨래와 가구 뒤를 희뿌옇게 덮을 곰팡이가 생각나

잠시 지긋지긋해진다.



저 먼발치에 아주 오래된 사원이 눈에 들어온다. 

주홍 지붕의 낡은 경사를 따라 내려앉은 용의 석상 위에도 겨울 안개가 서려있다.

'저 용의 석상은 수백 년의 비바람을 족히 견뎌내 왔겠지?'

안개를 맞으면 꿋꿋한 용의 마음이 따듯해 지기라도하는지 

떠나고 싶을 때가 수도 없이 많았음에도

여전히 하노이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내게 

오래된 서정을 선물한다.


좋을 것도 아름다울 것도 아닌데
하노이의 안개는 희한도 하다



하노이의 거리를 걷는 일은 깊은 호흡을 하고 싶을 때 꺼내는 루틴이다.

왠지 베트남의 거리에는 '응답하라 1988'의 감성이 녹아 있다.

트리 거리도 구경하고 실크 거리도 구경하며 한참을 걷다 보면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친구들도 그리워지지만

아니 그들이 그리워서 걷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낭만이 깃든 낡은 창문들이

이국의 향이 나는 따듯한 차 한잔을 건네는 탓에,

아직도 낯선 역설로 내 마음에 차는 까닭이리...


몇 년이 흐른 후에도

하염없이 만 페이지를 넘겨가고 있을런지 알 수없지만

하노이의 첫 장,

2006년의 낙엽 밟히던 4월의 봄도

푸릇한 초록의 12월을 가진 2022년 하노이의 겨울도

나를 머물게 하는 서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여기.

초록 겨울의 하얀 안개 밑.

나는 외로우면서도 외롭지 않게

5800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낭만도시 하노이에서.


2022년 크리스마스에 남겨 두었던 글로 마무리를 맺는다.                                                   

           

하노이 호안끼엠 거리의 봄과 겨울 ⓒ 마틸다 하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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