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hong Nhị và Phong Nhất_ 퐁니와 퐁녓마을의 북소리
K Pop덕에 나의 나라 대한민국의 호감도가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높은지 체감하면서 산다.
블랙 핑크 상하의로 차려입은 십대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SNS에 올릴 사진 찍기에 심취하고, 카페 인테리어도 블랙 핑크 버전으로 꾸며 자국민의 관심을 끄는 요즘의 베트남이다. 학교 행사 때마다 베트남 학생들은 한국 아이돌 그룹의 댄스 경연을 하고, 한국 화장품과 한국 홍삼은 인기 선물 순위 1위이다. 베트남에 삼성이 있어 어깨가 쓱 올라가고 불과 얼마 전까지 종합 운동장에서 수만 명이 파도타기를 하며 박항세오(박항서감독)를 외치며 축구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오징어게임'시리즈물이 전 세계를 강타하던 2021년에는 하늘을 찌르던 달고나 매출로 두어 달은 나의 입이 쭉 찢어졌었고 그즈음 오징어게임 열기만으로 베트남 방송국 신문사등이 찾아와 한 달 안에 세 번의 인터뷰를 하는 한국인 카페 사장이었다.
그뿐인가. 베트남 친구들은 내 화장대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른다.
택시를 타던, 거리를 걷고 있던 "엠 한꾸억 아?" 너 한국인이냐며 조건 없는 호의를 표한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괜찮은 나라였나. 어느 국적도 부럽지 않을 때가 많다.
한국인이어서 편한 것이 정말 많은 것이 사실이다.
며칠 전 한일전 농구 경기를 보며 남편은 경기 내내 욕을 해댔다.
"요즘 애들은 일본을 이겨야만 한다는 근성이 없어. 아유 아유 답답해. 제발 좀 빨리 움직여!!"
우리 세대 까지는 이어져오던 반일 감정, 무조건 일본은 이겨야 한다는 한국인만의 군중심리가 MZ세대들까지는 이어지지는 않는 시절이 되었다.
베트남도 그럴 것이다.
비록 K Pop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아픔이 남아 있을지라도.
둘째 아들이 한베 수교 30주년을 맞아 진행한 다문화 사회 정책에 대한 연구 논문 및 한국의 위안부와 베트남 전쟁 역사비교 논문의 공동 저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러한 경험 가운데 우리는 조금 더 깊이 베트남의 역사와 문학 그리고 남겨진 아픔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꽤 많았던 것에 감사한다.
K Pop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잠시 숨을 멈추고
커튼을 한 겹 들추어 보면
창 밖 너머에 다른 세상이 보인다.
그 창 밖에는 아직도 아픔 속에 담구어진 한국군 베트남 학살당시의 생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한 한평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났다 버림받은 수많은 라이따이한이 있다. 베트남 사회에서도 사회적 경제적 차별을 받으며 '경멸적인 한국잡종혼혈(라이따이한)'이란 뜻을 담은
그 이름마저 너무 아픈 한국계 혼혈아들이다.
우리가 그 커튼을 한 겹 들어 올릴 때
비로소 가슴 아프게 들려오는 북소리가 있다.
'둥! 둥! 둥!'
죽어가던 아버지가 울리던 북소리
설 명절을 하루 앞둔 그날, 당민코아(Đặng Minh Khoa)의 아버지 당소(당시 59살)는 집 앞 사당에서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한국군이 집에 들이닥쳤고 한국군은 거세게 항의하던 그에게 총을 겨누더니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마을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북을 울렸던 것이다. 눈앞에서 온 가족의 학살을 지켜봐야 했고 살던 집은 불태워 버려진 당시의 생존자들이 아직 남아 있다. 가족의 주검을 우비에 싸서 급하게 묻어두고 그 자리를 급히 도망쳐야 했던 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해도 긴 역사의 통로 안에 발목까지 차올라 있는 그들의 아픔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019년 3월 29일 <한겨레21>는 이 같은 사실을 제1256호에 ‘한국군은 사탕을 나눠주며 주민을 모았다’라는 기사로 개제했다. 1968년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마을에서 한국군은 사탕을 주며 베트남 주민을 한 곳으로 모아 학살을 잔행 했다. 그 사건에 대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 소송을 냈고 그들은 1심에서 승소했다. 베트콩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총을 쏴야만 했던 한국군의 애잔함. 같은 한국인으로서 한국군도 역시 피해자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유도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몇 명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그들의 인생 가운데 수많은 밤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웠다. 이들의 살아있는 동안 가족을 학살한 한국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
"한국으로부터 물질적, 경제적 도움은 받을 필요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한국 정부가 한국군이 저지른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를 원한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요구 조건이었다. 너무 억울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그들에게 한국 법원은 사건발생 55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에 대해 ‘가해자 한국’이 피해 베트남인에게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주었다. 적은 보상 금액이었지만 그래도 한국은 남은 피해자들에게 작지만 뜻깊은 위로를 전달했다.
(출처: <한겨레 21> https://www.hani.co.kr 에서 발췌하여 편집함)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눈앞에서 온 가족이 말살당하고 뱃속의 아이마저 숨을 거두는 장면을 목도하던 이들에게
한 번의 사과
한 번의 인정이
한 겹의 붕대는 되어줄지언정
그 깊고 진한 상처에 대한 수술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한국인인 나를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베트남에서
한 겹의 커튼을 열지 않고 살아가는 날들이 더 많기에
가끔 커튼을 들추어 창문을 열어 보는 것을,
둥둥둥 아프게 울리는 그 북소리를 기억하는 일을,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