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리안 –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
우리 시대에 의미란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각 시대는 각 시대만의 합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람을 보면 매우 역겹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고 말하면 됩니다. 의미 부여는 단테가 살던 시대에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카프카에게서 무엇을 볼 수 있나요? 카프카는 알고 있습니다. 기존에 말하던 의미가 다 거짓이었음을. 하지만 동시에 그는 새로운 의미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울하지만 동시에 희망적입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를 나갈 방법이 있을 거라고.
이것이 카프카가 실존주의 문학의 시작이라고 보는 이유입니다. 실존주의가 무엇인가요? 나의 현재 상태가 설명될 수 없는 동시에 현재 말고 다른 삶은 없다는 게 실존주의입니다. 인간은 말합니다. “내가 왜 장애인으로 태어났을까? 그냥 그런 거야. 이유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어. 중요한 건 장애인으로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뿐이야.“ 본질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실존입니다.
세계와 삶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럴 뿐입니다. 이게 나쁜 걸까요? 어느 시대에나 빛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몬드리안은 이러한 세계를 표현합니다. 그는 화가가 “세계를 묘사했다.”라는 말에 역겨움을 느낍니다. 화가는 단지 내 눈이 본 것을 그렸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 누구도 세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몬드리안은 세계가 아니라 기호를 그립니다. 말하자면 그는 도덕에 대한 책을 쓰지 않고 오직 실정법에 대한 책만 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 사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삽니다. 하지만 그동안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실제 세계라고 말해왔습니다. 몬드리안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기호 속에 산다고. 그게 전부라고. 실정법이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절한 처방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몬드리안은 절망하지도 않고 새로운 의미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있는 기호를 묘사할 뿐입니다. 몬드리안은 모든 걸 포기했습니다. 몬드리안은 그 어떤 의미도 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을 뿐입니다.
이게 모더니즘입니다. 헤밍웨이, 엘리엇에서 우리는 몬드리안과 똑같은 세계관을 봅니다. 이들은 의연하고 초연합니다. 스토아주의는 이렇게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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