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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Mar 20. 2020

내 자리, 그녀의 뒤 5미터쯤

넘겨짚지도 말고, 무심하지도 말자.

딸 너에게.


내 친구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어. 

결혼 생활이 늘 좋을 수만은 없지만. 

그래서 몇 번씩 '이 결혼을 깰까 말까?'

고민하기도 한다지만. 

막상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한 번쯤은 멈칫'하게 될 거야. 


결혼생활이 더러워진 빨랫감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저분해진 부위만 살금살금 비누칠해서 비벼 빨아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있다면. 

새하얘진 옷처럼  탈탈 털어 

빨랫줄에 척 걸쳐 널어놓을 수만 있다면.  

햇빛 아래 새것처럼 말린 다음 잘 개켜서 

서랍 속 제자리에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엄마는 예전에 지인의 이혼 소송 때 

엄청난 분량의 서면 작성을 대신 해준 적이 있었어. 

변호사에게 전달해야 할 결혼생활의 귀책사유를 

빼곡하고도 장황하게 적어 내려가야 했던 일은 

생각보다 아주 힘겨웠어.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듣고 간추려 적는 것만으로 

부부 사이의 헤집어진 감정들 중 일정 부분이 

내게로 꾸역꾸역 넘어왔지. 

모래사장 위 출렁대며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스며들어오는 파도처럼. 

막아보려 용을 써도 상처 입은 감정들이 

앞다퉈 내게로 달려들었어. 


나도 이혼 한 번을 한 듯한 느낌이었어. 

나의 일이 아니었는데도 

내 감정과 분리해서 바라보기가 어려웠어.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려 했던 일이었지만 

두 번은 하지 못할 일이었어.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나의 반응의 정도가 

예상 밖으로 너무 컸기 때문이야. 

물론 그때는 20여 년 전이었으니 

내가 어려서 경험이 없었기에 

더 우왕좌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혼을 직접 겪는 당사자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함부로 넘겨짚지 말고, 함부로 나서지 말고, 

함부로 위로를 가장한 동정 따위를 보내서도 안된다. 

다른 이의 슬픔과 고통은 형태를 달리해서 

언제든지 나에게로도 올 수 있는 슬픔과 고통이란다. 

그걸 모르면 안 된단다.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에 '함부로' 구는 행태도 나쁘지만 

초지일관 '무심함'도 그에 못지않게 나쁘다.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해 줄 수 있어야 해. 

일정한 속도로, 

슬픈 그들의 뒤를 지켜줄 줄도 알아야 하지.


적정 간격을 두고 뒤따르려고 해.

뒤를 봐주는 누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슬픔에 겨운 사람은 

충분히 슬퍼하다가 제자리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


내 지금의 자리는

그녀의 뒤.  

5미터쯤이란다.



친구에게 주는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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