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상을 한지 다섯 달 정도 되었습니다. 초반에는 일어나서도 꽤 오랫동안 졸거나 멍하게 앉아 있기도 했고, 낮에 낮잠을 몇 시간씩 자기도 했죠. '이럴 거면 새벽에 뭣하러 일어난 거야?' 스스로에게 반문하기도 했어요. 자책은 덤으로 따라다녔어요.
새벽잠이 줄은 대신 낮잠이 늘어난 이상한 상황. 전체적인 수면 시간에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아랫돌 빼내어 윗돌을 괸다는 속담이 제 경우라고 생각했어요. 피곤을 달래는 임시방편을 몸이 알아서 스스로 조절하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허무했지요.
'새벽 기상, 이거 계속해야 될까?' 한 번 의심이 생긴 자리에는, 그 빈틈을 노리고 나약한 마음이 똬리를 틉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새벽 기상하려고 스르륵 일어났다가 도로 스르륵 누워서 한 시간 이상을 더 자기도 했어요. 그 후 저는 '스르륵' 일어나지 않아요. 한 번에 '벌떡'일어납니다. 그러려면 컨디션 조절이 관건이더군요. 밤에 최소한 11시 전에는 취침을 해야 새벽 5시를 전후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훼방꾼 역할을 남편이 종종 하고 있어요. 남편이 야근이나 회식으로 새벽을 넘겨 들어오면 정말 몇 시간 잘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컨디션 조절에 실패해서 낮에 책을 읽는데도 집중이 잘되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해요. 주요 레퍼토리는 똑같습니다.
"나 새벽에 일어나야 되니까 빨리 오세요 오 오오~" 오세요 오 오~~~ 하고 끝을 올리면 경고입니다. '빨리 안 오면 진짜 안 좋은 일 생길 수도 있다!' 그 뜻이죠.
남편은 말합니다. 뭣하러 빨리 일어나냐고. 늙어가면서 자꾸 안 하던 짓 한다고. 그러다 몸이 순간적으로 확 나빠진다고 말이죠. 사실 남편은, 기상 시간에 있어서만큼은 저보다 훨씬 부지런한 편입니다. 날마다 먼저 일어나서 책이나 신문을 보든 영어나 외국어 공부를 해왔거든요.
그때마다 저는 초지일관 늘 잠을 잤습니다. 아침잠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게 평생의 신조인 양 말이죠. 그랬던 제가 새벽에 일어나겠다고 남편의 퇴근 시간을 일일이 체크하니 귀찮기도 했을 거예요. 그런 과정들을 한두 달 겪고 나니 남편도 회식 후 늦어지지 않도록 부랴부랴 집으로 옵니다. 물론 더 늦게 오는 날도 잊지만, 저의 새벽 기상을 확실히 인지하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방해하지 않으려 애를 써줍니다.
몇 달 전 온라인 독서모임을 하면서 새벽 기상 미션이 있었는데 제일 마지막 날만 어겼습니다. 하루에 2만 2 천보를 걷는 강행군을 한 터라 6시를 넘겨버렸죠. 그렇게 단 하루를 제외하고 여태껏 평균 5시를 전후해서 일어났어요. 4시 전에 일어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어나면 날마다 끄적끄적 글을 쓰든지 책을 읽든지 아니면 오래도록 생각을 하든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처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요.
새벽 새의 지저귐입니다.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새소리에 처음엔 당황했어요.
'우리 동네에 새가 있었어?????'
설마, 새가 없었겠어요? 당연히 있었는데도 저만 몰랐고, 제 눈에만 안 띄었던 거죠.
창문 너머로 새벽 청소차가 쓰레기를 실어 가는 소리, 저기 먼 도로 위의 아스라한 자동차 소리, 가끔씩 울려 퍼지는 자동차의 경적. 그리고 새벽 특유의 차분함과 여유로움. 시원한 바람. 천천히 그렇지만 단호하게 밝아져 오는 세상. 그렇게 맞이하게 되는 아침.
제가 새벽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결코 몰랐을 세상에 대한 예민한 감각들이 일깨워지더군요. 꾹꾹 눌러놓아서 제 몸 어느 구석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던 감각들은, 제 마음을 살며시 흔들어줍니다. 거의 시들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이파리들이 살아나 부지런히 움직여요. 그 소중한 감정들이 저의 행동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조금씩 조금씩 밀어붙여 줍니다.
저는 나날이 조금씩 성장하고 싶습니다. 손톱 반만큼도 안된다면 깨알만큼이라도 겨자씨만큼이라도 저는 저를 성장시키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싶어요. 미라클 모닝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요즘 저는 다섯 달 넘게 일찍 일어나면서 저를 키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