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저는 술을 끊었습니다.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금주가 절실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었답니다. 평소 맥주 한 캔 정도는 목마를 때 마시기도 했고요. 때때로 저녁이 먹기 싫은 날은 차가운 맥주에 프랑크 소시지를 구워 먹기도 했습니다. 참크래커와 조미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 안주였죠.
제가 이렇게 맥주를 시시때때로 마시게 된 이유는 남편 때문인데요. 남편이 술을 좋아합니다. 포도주와 맥주를 좋아해요. 마트에 가면 세계 맥주 코너에서 꼭 만 원에 4개짜리 맥주를 종류별로 사 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 따라서 이것저것 다양한 맥주를 마셔 보았어요.
저는 맛에 좀 둔감한 편이어서 벨기에산 호가든(약간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단순 취향 문제)만 빼면 국산 맥주 포함 어느 나라 맥주든 다 마십니다. 특별히 선호하는 게 없어요. 주는 대로 잘 마셨습니다.
젊었을 때는 소주에 레몬과 오이를 탄 것들도 잘 마셨고요. 청하도 좋아했었습니다. 술 마시고 알싸한 기분에 친구들과 떠들고 뛰어다니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었죠. 그런데 나이 들면서는 소주나 청하를 잘 안 마시게 되더라고요. 가볍게 한잔 마실 수 있는 술로는 맥주만 한 게 없다 싶었습니다.
남편 따라서 일주일에 서너 캔 정도의 맥주를 마셨던 것 같아요. 평상시에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지만 눈앞에 보이면 마시고 싶은 게 바로 맥주였어요. 맥주는 저에게 딱 그 정도 의미의 술이었습니다. 남편 따라 마시는 술.
올해 초 어느 날인가 저녁 식사 후 TV 보면서 남편이랑 맥주를 마셨거든요. 저희는 맥주 마시면서 이런저런 세상사 얘기를 하는데요. 하다 보면 늘 길어집니다. 그래서 새벽 1-2시까지 저는 맥주를, 남편은 중간에 바꿔서 포도주를 마시곤 하죠.
그런데 그날 길어진 이야기 탓에 제가 평소보다 한두 모금 정도 더 마셨었나 봐요. 갑자기 속이 불편하더라고요. 체한 듯한 증상이 있어서 욕실에 갔다가....
술기운에 그만 미끄러지면서 얼굴을 세면대에 부딪히는 사고가 생겨버렸어요.
그런데 취기가 마취제 역할을 해준 덕분인지 많이 아프지는 않더라고요. 속만 메슥거릴 뿐이라서 그냥저냥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뒷날이었어요. 속이 쓰리고 아프더니, 토하고 난리가 난 거예요. 맥주가 제 뒤통수를 그렇게 칠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제가 많이나 마셨나요? 겨우 맥주 두 캔에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몸도 허약해졌나 보다 싶으니까 많이 우울했습니다.
아픈 뱃속만큼 얼굴 상태도 안 좋았어요. 세면대에 부딪힌 얼굴의 반쪽이 멍들어서 아주 볼만했거든요. 눈두덩이랑 광대뼈까지 죄다 멍이 들었으니까요. 의심의 눈초리로 보려고 작정한 사람이라면 제 얼굴을 보자마자 매 맞는 아내를 떠올렸을 거예요.
속이 너무 아픈 나머지 하는 수없이 병원에 가서 링거까지 맞았어요. 얼굴은 다행히 골절 같은 건 없었지만 그 후 멍이 빠지고 낫기까지 3주 정도가 걸렸나 봐요.
저에게 있어서 맥주는 알코올이 조금 함유된 시원한 음료일 뿐이었는데... 그즈음 깨달았어요.
'더 이상 맥주를 음료로 즐길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체력도 아니다.'
몸도 못 가누어서 얼굴에 멍까지 들게 했다는 사실이 너무 싫더라고요.
나쁜 습관은 쉽게 형성되지만 살아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홀짝홀짝 마시던 맥주가 제 삶에 긍정적 기운을 불러일으켰을까요? 탄수화물의 양을 늘여 혈당치만 높이지 않았을까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탄수화물의 양을 줄여서 혈당치를 낮추어 건강하게 살고자 식생활 개선을 많이 합니다. 탄수화물은 밥, 빵, 국수, 과일, 케이크, 과자, 음료수 등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맥주에도 있습니다. 주식으로서의 밥, 국수, 빵 등의 양 조절이 힘들다면 기호 식품인 맥주나 믹스커피 그 외의 과자류 등의 양을 줄여서라도 제 건강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틀 건너 맥주를 마시는 나쁜 습관은 저녁 식사를 대충 하게 만들었고, 늦은 밤까지 야식을 하게 만들었고, 새벽까지 잠 못 들게 하였고, 뒷날 늦게 일어나도록 만들었죠. 결국 마지막에는 속도 뒤집어 놓고 얼굴까지 멍들게 했고요. 한낱 기호품에 지나지 않는 맥주에 제가 대책 없이 취하고 아프고 다치기까지 하는 상황이 참 싫더군요.
그래서 그날 이후 저는 좋아했던 맥주를 끊었습니다.
좋은 습관은 저를 좋은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나쁜 습관은 저를 현재의 상태에 주저앉히거나 훨씬 뒤로 물러서게 만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구토하고, 얼굴 다친 것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제 속에 많은 상처를 남겼어요. 습관에 대해 제 스스로를 돌아보게도 하였고요. 보이는 외상보다 내상이 훨씬 컸던 경험이었어요.
살면서 제가 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거나 저를 해롭게 하는 음주 행위는 결코 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금주 결심에 불을 댕기고도 싶었습니다. 작년에 하다가 도중에 그만둔 블로그에 이리저리 끄적대기 시작했습니다. 개인 일기장 용도로 썼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쓴다'라는 행위가 저를 증명하고 있더군요.
영국의 소설가 겸 극작가 윌리엄 서머셋 모옴은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라고 했답니다. 면도는 매일 하는 거잖아요. 매일매일 하는 단순한 행위에도 '우리만의 철학'이 있다는 거지요. 습관처럼 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각과 철학'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저를 증명해 내고 저의 철학을 밝히는 '매일의 일'은 대충 하는 일이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결같이 정성을 기울이면서 부지런히 하는 그 매일의 일이 바로 '우리들'이고 '우리 자신의 철학'일테니까요.
이틀 건너 마시던 맥주를 끊은 대신 저는 매일 포스팅을 하는 삶을 선택했어요. 삶이라는 것이 순간순간의 선택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저는 그 매순간을 이제 함부로 살지 않으려고 해요. 함부로 살기 싫어졌습니다.
살다 보니 늘어난 경험치를 바탕으로 제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인생의 방향이 긍정적으로 바뀌며 삶이 진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애쓰면 애쓴 만큼 조금 더 바람직하게 사는 게 인생이라는 걸 이 나이에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즈음 제 건강을 위해 더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저는 이런 애씀을 '나는 나를 키운다'라는 말로 세뇌시킵니다. 저는 오늘도 저를 키워요. 아직은 작은 새싹에 지나지 않지만요. 조금씩 자라날 거라 믿어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