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믹스커피를 좋아합니다. 다른 분들은 아메리카노를 우아하게 마실 때 저는 믹스커피를 홀짝댑니다. 밖에 나갈 때도 믹스커피 봉지를 몇개 챙겨 들고 다니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비슷한 맛을 찾아 마십니다.
혼자 스타벅스에 갈 때에는 캬라멜 마끼아또를 마셔요. 엄청 달아요. 그런 걸 어떻게 마시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 입맛 수준에서는 그게 믹스커피랑 가장 비슷하거든요. 누군가와 카페를 같이 갈 때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요. 제가 값을 치를 때는 상관없지만 지인이 제 커피값을 내는 상황이라면 가장 싼 음료를 마십니다.
어차피 어떤 커피도 제게는 믹스커피만 한 만족감을 주는 맛이 아니기에 지인의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 믹스커피에 비해 너무 비싼 커피를 마시고 만족스럽지도 않은 건 효용 측면에서 너무 떨어지는 일이니까요.
남편은 믹스커피를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건강 생각해서 질 좋은 커피를 마시라고 권했지만 저는 들은 척도 안한 채 20년 넘게를 그렇게 살아왔어요. 믹스커피만 마시면서 말이죠. 남편은 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마트에 가서 믹스커피 사 오라고 시키면 400개 들이의 어마어마한 박스를 들고 옵니다. (먹고 죽으라는 소리인지..쿨럭) 그럼 두고두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지요.
저는 밥은 안 먹어도 믹스커피는 꼭 마셔 왔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헤이즐넛이나 루왁커피 같은 것을 선물 받아서 먹어 본 적도 있었거든요. 결국 돌고 돌아 믹스커피로 다시 오게 되더군요.
생각해보면 저에게 믹스커피란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 위해 잠을 쫓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셨던 음료였어요.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제 손 닿는 곳에 유일하게 있던, 만져질 수 있는 따뜻함이었지요. 힘들고 지칠 때 봉지 하나 뜯어서 뜨거운 물에 후루룩 타 마실 수 있는 편리함도 좋았고요.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도 만족스러웠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끈함도 마음에 들었어요.
속상하고 분한 일을 당했을 때도 믹스커피 봉지를 뜯었어요. 그봉지 하나가 제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줄 때가 있었답니다. 커피 알갱이들을 일일이 갈아서 커피포트에 차분히 내려 마실 정도라면 힘든 것도 아니고 지친 것도 아니고 속상하거나 분한 일을 당한 것도 아니에요. 제 경우에는 그랬어요.
시도 때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소용돌이치는 제 슬픈 감정을 다스려 줄 수 있는 건 믹스 커피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고급 커피가 주는 풍미보다 지난 세월 저와 동고동락했던 믹스커피가 주는 익숙한 맛에 길들여졌던 것 같아요.
아마도 저라는 사람은 미각보다는,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감정에 더 많이 좌우되는 사람이었나 봐요. 남들이 다 맛있다고 하는 커피보다 제게 추억이 된 믹스커피를 즐겨 온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믹스커피를 마셔도 여전히 졸리고, 피곤하더라고요. 그 옛날 제 정신을 흔들어 맑게 깨워주고 감정도 다잡아 주던 믹스커피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이미 수 십 년 동안 중독되었기 때문에 그냥 습관처럼 마셨어요.
최근에 마키타 젠지의 <식사가 잘못됐습니다>라는 책을 읽으며 믹스커피에 대한 맹목적인 저의 사랑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액체 음료(캔커피 포함이니 당연히 믹스커피도 포함이겠죠)가 혈당을 지나치게 끌어올려 췌장에서의 인슐린을 과다분비시킨다고 해요. 일명 혈당 스파이크 유발인자들이 있는데 액체 음료, 과자, 케이크 등등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들이죠. 제가 믹스커피만큼 좋아하는 게 과자, 케이크 기타 등등입니다.
높아진 혈당치는 뇌내 물질을 분비하여 사람의 기분을 순식간에 좋아지게 만드는데 그렇게 기분 들뜨게 만드는 지점을 '지복점'이라고 합니다. 지복점이란 소비자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지점. 욕망이 충족되는 상태를 가리켜요.
그리고 식품회사에서는 소비자의 만족도가 가장 큰 지복점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제품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제품에 빠져들게 만드는 거죠. 무엇에 중독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제품 혹은 그 대상이 사라졌을 때 우리 자신의 삶이 혼란으로 빠지게 놓아두어서는 안되는 거잖아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들은 삶에서 하나씩 제거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식품회사의 지복점에 의해 믹스커피, 과자, 사탕, 초콜릿 등을 마구잡이로 먹었던 지난날을 돌아 보게 되었어요. 저는 여태껏 과도하게 단 음식들이 건강에 나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동안은 알았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에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이젠 '달달한 것들'과 결별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문득 저의 욕망은 제가 조절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인생 후반전 저를 보다 잘 키우기 위해 좋은 습관을 몸과 마음에 새기는 중입니다. 좋은 습관을 하나 새기면서 나쁜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좋은 습관이 제자리를 잡는데 방해가 될 거라 여겨졌어요.
옷장 안에 헌 옷을 빼내지 않은 채 새 옷만 채워 넣으면 그 옷장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뒤죽박죽인 채 정리가 안되어 필요한 새 옷을 빠르게 찾지 못하게 될 겁니다. 간절한 시기에 필요한 것을 제대로 찾아낼 수 없는 삶. 제 안의 모든 것들이 뒤섞여 우선순위조차 가늠할 수 없는 삶과는 헤어지고 싶어졌습니다.
400개 들이 믹스커피를 하루 서너 개 이상씩 마시니까 석 달 만에 끝이 보이더군요. 100개 들이를 새로 하나 사서 2봉지 먹었을 때 비로소 책을 읽고 결심했습니다. 제 몸에 안 좋을 수 있는 음식들은 과감하게 다 끊기로 했어요. 평소 좋아하지도 않았던 채소 샐러드도 먹습니다. 하루아침에 소가 된 기분이라는 것만 빼면 그냥저냥 마지못해 배를 채울 만은 합니다.
남편은 예전부터 아침을 샐러드로 우아하게 먹자고 했지만 저는 '집에 있는 밥 먹으면 됐지 무슨 샐러드?' 그랬거든요. 저의 기쁨은 밥 먹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믹스커피 한 잔 바로 마시는 거였으니까요.
이제는 샐러드를 준비합니다. 남편은 황당해 하면서도 좋아해요. 본인이 그렇게 말해도 귀 막고 듣지 않더니 책 읽고 사람이 변했다고 하죠. 채소며 올리브, 발사믹 식초, 올리브유, 치즈 등등 남편이 혼자 마트에 가서 장을 봐 왔어요. 그렇게 저희는 대충 만든 샐러드를 먹고 있어요. 탄수화물의 양을 조금씩 줄여서 많은 질병의 원인이 되는 혈당치를 낮춰 보려 합니다.
싱크대 한쪽 구석에 들어 있는 믹스커피 100개들이 박스는 버리지 않았어요. 본전 생각 때문에 그런 건 아닙니다. 눈에 보인다고 해서 한번 결심한 것을 번복하여 다시 먹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저 '제 자신의 결심의 실체'로써 남겨놓고 싶었어요. '이래 봬도 나, 30년간 마셔온 믹스커피도 끊는 여자야.' 스스로에게 알려주고도 싶었고요. 앞으로의 저의 욕망은 제가 다스립니다. 식품회사에서 정해 준 대로 조작된 욕망에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아요.
습관이란 '철사를 꼬아 만든 쇠줄'이라고 하더군요.이왕 쇠줄을 만들 거면 애초부터 제대로 된 철사로 정성을 다해 꼬아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좋은 습관 하나 들이는 그 노력보다 더 피나는 노력으로 저는 저의 나쁜 습관 하나를 떼내고 있는 중이에요.
6월 28일부터 지금껏 믹스커피를 한 봉지도 뜯지 않았습니다. 넉달째 믹스커피가 마시고 싶을때마다 공유 배우를 떠올리며 '카누'를 먹고 있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 역시 커피는 믹스가 맛있구나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