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어느 한 시기, 아버지는 귀가할 때마다 새로운 물건을 들고 왔다. 어느 날은 칫솔을 사 왔다가 다른 날은 1회용 밴드를 사 왔다. 면도기를 사 온 뒷날은 사인펜 세트를 사 왔다. 집에 이미 있어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뭐 하러 사 오냐며 엄마한테 구박도 받았다. 물건들은 평범했지만 개중에는 조악하거나 불량인 것들도 섞여 있었다. 그럴 때는 더 혼이 났다.
물건들을 사면서 점점 아버지의 안목이 늘었던지 어느 날은 발뒤꿈치의 각질을 긁어내는 도구를 사 와서 엄마한테 칭찬을 들은 적도 있다. 아버지가 라이터 불에도 타지 않는 요술 지갑을 사 와서 시범을 보여 줄 때는 신기했다. 다음엔 또 어떤 물건을 사 올까 은근히 기대하며 기다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물건들의 대부분을 지하철 내에서 판매하는 사람들한테 사 왔다. 일명 잡상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요즘은 인근 소란, 질서 문란 등을 이유로 지하철 내에서의 판매행위를 금지하고 벌금도 부과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엔 커다란 트렁크에 물건을 넣어서 지하철의 칸마다 옮겨 다니며 판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한테 왜 자꾸 지하철 물건을 사 오냐고 했더니 ‘천 원짜리 딱 한 장’만 있으면 된다는 그들의 말 때문이라고 했다.
물건 가격을 천 원이라고 하지 않고, 천 원짜리 딱 한 장이라고 하는데 사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거였다. ‘딱 한 장’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버지는 ‘그 한 장’만큼은 내어줄 주머니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눈 감고 자는 척하거나 무시하며 할 일을 하기에는 ‘딱 한 장’이라는 표현이 너무 절박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때 생각했다. 아버지는 앞으로도 쓸모없는 물건을 계속 사 오겠구나. 엄마의 구박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의 눈길을 사로잡던 지하철 판매원이 갑자기 급증한 시기가 있었는데 IMF 때였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대량 실직 사태를 맞이하면서 갈 곳 없는 직장인들은 서울역과 영등포역, 시청, 을지로 등을 헤맸다. 직장을 잃거나 또는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은 거리나 지하철 내에서 물건을 판매하기도 했지만 끝내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성이다 역 근처 길거리 어느 구석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노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각 지역별로 노숙인 복지시설이 여러 군데 생겼다는 것이다. 노숙인에 대한 일시적인 숙식 제공과 의료지원을 해주는 종합지원 센터도 있고 자립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자활 시설도 있다. 건강 상의 치료와 보호가 필요한 경우에는 재활시설이나 요양시설을 이용하면 된다. 모든 센터와 시설에서는 잠자리와 식사는 기본적으로 다 제공해 준다.
노숙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두 가지의 경우로 나뉜다. 노숙자 문제를 개인의 능력과 자질, 습관과 태도의 부족으로 보는 경우에는 성실하게 일하는 국민들의 세금이 그들의 지원 사업에 쓰이는 걸 탐탁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구조적 문제로 바라보는 경우에는 노숙자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사회 안정망 부족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보며 여러 형태의 지원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빨간 조끼, 빨간 모자 빅판 아저씨.
홍대입구 전철역 2번 출구에는 빨간 조끼를 입은 아저씨가 있다. 빨간 모자, 빨간 가방, 빨간 카트가 상징이 되어버린 아저씨는 빅이슈 판매원이다. 빅이슈는 격주로 발행되는 주간지이다. 또 노숙인 자활을 돕는 비영리 사단법인이자 사회적 기업의 이름이기도 하다.
빅이슈는 1991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런던의 홈리스(주거 취약 계층, 노숙인)가 증가하자 그들에게 잡지를 판매할 수 있도록 하여 자립을 도왔다. 31년간 이어져 온 빅이슈는 잡지뿐만 아니라 빈곤층을 위한 교육 및 취업, 사회적 투자 등에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빅이슈는 2010년에 창간이 되었다. 격주로 발간되는 빅이슈 잡지는 매 호 1만 5000부를 발행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지고 있다. 노숙인 생활을 하다가 빅이슈를 판매하는 사람을 빅이슈 판매원, 줄여서 빅판이라고 한다. 매년 100여 명의 노숙인들이 빅판으로 등록하고 있다는데 이 중 열심히 판매하는 분들은 자립기반도 만들고 임대 주택에 입주를 하기도 한다. 노숙인들이 거리에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사회적 기업 빅이슈의 가치이자 의미이다.
빅이슈의 취지에 공감하며 많은 이들이 재능기부에 참여한다.
2020년 3월 기준, 빅판을 포함한 홈리스 103명이 임대주택에 입주하고 36명이 재취업을 하는 등 지역사회에 정착하고 있다. 현재 서울, 경기, 부산의 주요 지하철역과 거리에서 50여 명의 빅이슈 판매원이 활동 중이다.
한 권에 5000원인 이 잡지가 판매되면 그중 2500원은 빅판의 몫이 된다. 빅판은 그 돈 2,500원씩을 모아서 자립의 발판으로 삼는다. 노숙인의 삶에서 잡지를 판매하는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취업을 위한 활동에도 새롭게 도전을 할 수 있다.
집을 떠나 노숙생활을 결정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겠지만, 노숙 끝에 재기를 꿈꾸며 거리에서 빅이슈 판매원으로 활동할 결심을 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숙에 익숙해지면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점점 어려워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해진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립의 의지를 다지는 사람들에게는 응원의 박수와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빅이슈 잡지 안에 살며시 들어있던 빅판 아저씨의 쪽지.
지난겨울 홍대 근처에 갔다가 빅이슈를 한 권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잡지를 펼치다가 손바닥 반만 한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빅이슈 판매원 아저씨가 직접 써서 넣어놓은 쪽지였다. 아버지의 오래된 메모장을 살펴보고 있을 때라서 빅판 아저씨의 쪽지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잡지 한 권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일일이 손 글씨를 썼을 홍대 입구 2번 출구 빅판 아저씨. 정성이 그대로 느껴져서 참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