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서울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버렸다. 서울을 시작으로 폭등한 집값은 수도권으로 지방으로 번져나가 부동산 가격을 전국적으로 다 끌어올려놓았다. 젊은 세대들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는다는 ‘영끌 대출’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몸 하나 누일 공간을 마련하려고 들었다. 후배 K도 그중 하나였다.
K는 몇 년 전부터 집을 사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괜찮은 집을 찾기 위해 신중을 기했다. 괜찮은 집이란, 보다 적은 금액으로 보다 많은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는 발전 가능성이 큰 집을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던 사이에 집값은 들썩이기 시작했고 놀란 K는 그제야 계약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후보군의 제일 끄트머리에 있던 집조차 수 천만이 올라버려서 영끌 대출로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집값이 떨어질 경우엔 그야말로 파산이라는 생각에 계약을 결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있으면 진정되겠지. 집값이 떨어진다고 호언장담하는 유튜버들도 많으니까. 집값은 곧 떨어질 거야. 폭락해서 쭉 유지되면 더 좋고.'라고 여기며 그녀는 결국 계약을 포기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그때 계약을 포기한 자신을 원망한다. 스스로를 '벼락 거지', '영혼 파탄자'라고 부른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집을 살 기회를 원천적으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며 하소연한다. 주변의 주택 소유자들에 비해 턱없이 빈곤해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느라 멘탈이 다 부서져버렸다고도 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니 소화도 안되고 머리카락도 빠지며 늙는 중이라고 슬퍼했다.
돌아보면 후회되는 순간들은 우리들 인생 곳곳에 점처럼 박혀있다. 얼마나 깊게 박혀 있는지 잊고 싶어서 그 순간을 파내 흔적이라도 없애보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집 구매뿐 아니라 인생의 굽이굽이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이 얼마나 많은가. 그 선택이 두렵다고 마냥 미루기만 하면서 손 놓고 지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한참이 지나 죽을힘을 다해 조금씩 일어났던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타인의 부탁을 내치지 못하고 연대보증을 섬으로써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지난 선택에 대해 어떤 후회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분명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딸에게 '후회'의 감정을 일일이 나열하고 싶어 하진 않았다. 만만치 않은 세상사를 시시콜콜 들려주면서 딸에게 겁부터 집어먹게 하고 싶은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신중하게 하라고 했다. 살면서 후회하지 않는 순간이 한 번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또 매번 최상의 선택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상대적 가난이란 '가난'보다 '상대'로 인해서 실제 이상으로 더 크고 아프게 느껴지는 '가난'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상대적 가난'을 느껴가면서까지 스스로가 초라해지느니 그 기간을 마음 다스리는 시간으로 활용했고 다시 시작했다. 물론 이전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출발이었지만, 자칫 폐허로 남을 수도 있었을 실패의 땅에 씨앗을 뿌리고 꽃을 키워낸 것은 아버지 자신이었다.
승승장구하는 주변 친구와 지인들의 삶을 부러워하고 자신과 비교하며 주눅 들기만 했다면 그 작은 '처음'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현실을 직시했고 자신의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아주 조그만 일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4남매의 입에 밥을 넣어 주었고 옷을 입혀 주었고 학교에 보내 주었다.
아버지의 메모장에서 '이웃집 보석을 헤아리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문장을 보자마자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이웃집 보석 개수나 세고 있느라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조차 못하고 있다면 저승의 아버지가 호통을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화를 잘 안 내는 우리 아버지니까 화내는 대신 삐질 가능성이 훨씬 크지만...
'내가 너희들을 그리 힘든 여건에서도 키웠는데, 너희들은 남 부러워하느라 인생을 한탄해서야 쓰겠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라. 네 안의 보석을 찾아 헤아리거라.'
삐지면서도 할 말은 다 했을 아버지를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