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친구 중 한 사람은 자식 때문에 속을 끓였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어느 날 가출을 해서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훔쳐 타고 부산까지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 상황을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의 친구는 서울에서 트럭까지 대절하여 부산으로 출발했다. 트럭에 훔쳐간 자전거를 전부 싣고 나서 아들과 그 친구들까지 끌고 오는 과정은 흡사 전쟁과도 같았다고 했다. 사춘기 때 비뚤어져서 불량한 친구를 사귀고 나니 부모의 야단도, 호소도, 눈물도 아들의 귀에는 들릴 턱이 없었다.
아버지에게는 친구의 일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멀쩡했던 그 집 아들이 불량한 친구를 사귄 후부터 돌변하여 부모와의 관계가 남의 집 자식보다도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우리 4남매를 키우면서 특별히 다른 주의는 주지 않았는데 어쩌다 한 번씩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 친구를 가려 사귀라고? 너무 차별적인 말 아닌가? 입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해타산적인 사람이 되라는 건가?'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아버지에게 괜히 반항하고 싶어졌다.
나는 여중, 여고를 나왔는데 요즘도 그렇듯 당시에도 일진이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중학교 때도 그렇고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교실 내에서 기 쎈 아이들은 범접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을 뿜어댔다. 중학교 3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키 순서로 따지면 가장 앞자리에 앉았어야 할 내가 제비뽑기를 잘못하는 바람에 일진들 무더기 속에 떡하니 끼어 앉았던 적이 있었다.
그중 내 짝꿍이었던 키 크고 예쁘고 날씬한 일진은 웬일인지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볼품없이 작고 삐쩍 마른 나는 그들의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때 그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아서 몇 주를 지내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내 짝꿍이 아침부터 엄마한테 혼이 났다고 하자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내가 어젯밤에 술을 엄청 먹고 오늘 아침에 토를 했거든."
짝꿍이 투덜대며 말했다.
'술 먹고 토하니 당연히 혼이 났겠지.'
나는 짝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랬더니 엄마가 나더러 먹은 술 아깝게 토는 왜 하냐고 욕하는 거야."
'잉? 뭐라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술을 먹어서 혼이 난 게 아니라 아까운 술을 토했다고 혼이 났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일진들은 '네 엄마 말이 맞다'며 짝꿍을 구박했다.
짝꿍의 엄마도 날마다 밤마다 과음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모든 가정의 부모님이 전부 건전하고 건강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그리고 그런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서 사는 아이들도 힘들겠다고.
몇 주 후, 다시 자리가 바뀌면서 그 아이들의 한가운데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들이 나누던 이야기는 뇌리에 깊이 박혀서 잘 지워지지 않았다. 일진이라 불리는 아이들 중에도 부류가 나뉘어서 남한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아이가 있는 반면 겉모습만 불량하게 하고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한데 어울려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시에 '친구를 가려 사귀라'는 아버지의 말에 반감이 들기도 했지만 세월이 흘러 딸을 키우는 엄마가 되고 나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미성년인 자식이 외박하고 가출하며 술, 담배를 일삼는 걸 별일 아니라고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아버지가 남긴 메모장에 익자삼우(益者三友) 손자삼우(損者三友)라는 구절이 있었다. 익자삼우란 사귀면 도움이 되는 벗을 말하는데 심성이 착한 사람, 신의가 있는 사람, 지성을 겸비한 사람을 가리킨다.
손자삼우란 사귀면 손해가 되는 벗을 말하는데 겉치레만 잘하는 사람, 아첨하는 사람, 말만 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논어>에 나오는 익자삼우, 손자삼우를 보며 공자가 이익이 되는 벗, 손해가 되는 벗을 셋씩 나눠가며 구분했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기록하는 과정에서 공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해졌을 거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익과 손해라고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공자 역시 친구 사귀는 데에 중요한 원칙을 세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소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될 사람을 벗으로 사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는 법정스님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야 한다는 스님의 가르침을 예사로이 들을 수는 없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버려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쓸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중략)
한때는 많은 사람을 알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건 복되고 좋은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아무리 노력해도 접점을 찾을 수 없고 인연을 이어나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설프게 맺은 인연의 대부분은 끝까지 간 적이 없었다. 중간에 내가 나가떨어지던 상대방이 연락을 끊고 사라지던 끝이 났다. 그러나 귀한 인연은 30년이 넘도록 우정을 나누며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서로 마주 보기 힘든 인연이라면 각자의 길로 가는 게 맞다. 그 인연이 아니라도 세상에 흩어져 있는 진정한 인연을 만나면 된다.
아무에게나 진심을 보이며 시간 낭비하고 있느라 정작 자신에게 오는 귀한 인연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좋은 인연만을 만났으면 좋겠고, 그 좋은 인연에게 우리 각자가 좋은 인연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준비를 깍듯하게 마쳐놓고 있었으면 좋겠다. 일상의 삶을 진실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