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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29. 2019

삶이 기울어지면 불필요한 것을 버릴 때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다시 설 기회


추석 연휴에 '이생망'을 외치던 사람, 저였어요.

2년 전 추석 즈음 개인적으로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추석 연휴 기간 내내 우울감을 떨칠 수가 없었죠. 밥알 하나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상황이라서 추석 음식 같은 걸 장만할 기운이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남편과 딸아이에게도 대충 음식을 차려줬었어요. 몸도 마음도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워야 할 추석 연휴가 그땐 너무 괴로웠지요.


제가 생각한 대로 인생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중얼거렸어요. 망한 채로 인생 끝날 줄 알았었는데요. 다 쭈그러들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제 인생도 일단 평평한 자리에 옮겨다 놓고요. 햇빛 받게 하고 바람 느끼게 하고 향기 맡게 해 주니 조금씩 조금씩 펴지는 것 같더군요.


이번 추석 연휴는 체력 부족한 문제를 제외하고 마음은 편안했어요.  2년 전을 떠올려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음의 안정을 그 사이에 찾게 된 거죠.



기울어진 플라스틱 의자에서 삶을 배웁니다.





8월 여름휴가 때 강촌 엘리시안에서 새벽마다 일어나 산책을 했었어요. 숙소 앞 잔디밭에는 맥주를 팔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야외공연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테이블과 의자도 꽤 많았었죠. 새벽에 보니 의자들이 전날 밤과는 다른 모습으로 놓여있더군요. 처음 한두 개 봤을 때는 누가 일부러 장난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잔디밭에 있는 모든 의자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전부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아침 이슬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밤새도록 내려앉는 이슬로 인해 의자가 축축해지면 일일이 닦아줘야 할 텐데 의자를 기울여 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물기를 빼내는 거죠. 낮 동안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나머지 물기 한 방울 조차 사라져 버리고 나면 의자는 '기울어져 있기'를 멈추고 '똑바로 서기'에 들어갑니다. 의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받아낼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겁니다. 


기울어진 의자를 보며 새벽 산책을 하는 동안 저에게 온 지난 시련들은 제 안의 불필요한 것들을 빼내는 과정이었다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채우려면 그만큼의 또 다른 무언가를 덜어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느낍니다. 비우지는 않고 채우기만 하는 그 '맹목적 채움'이 삶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만든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어요.


삶의 진리는 거저, 공짜로 알 수는 없었습니다.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귀한 진리는 가슴에 새겨서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기울어져도 괜찮아요. 다시 똑바로 설 수 있으니까요.





살다가 문득문득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이생망'을 외칠 때, 하기 싫은 일을 잔뜩 미뤄둔 채 추석 연휴를 보냈건만 그 연휴의 끝이 보일 때, 주말만을 바라보며 지긋지긋한 일상을 견뎠는데 그 주말이 끝나가며 월요일이 다가올 때, '일상'으로의 복귀를 두려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럴 때마다 기울어진 야외용 플라스틱 의자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불필요한 물기들을 다 털어내고 고객들을 앉히기 위한 원래의 용도로 돌아간 의자를 생각하는 거죠.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시간 동안 힘들고 지친 마음, 불필요한 감정들은 다 쏟아냈으니 다시 일상을 받아낼 '단단한 인생 그릇'으로 내일을 맞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삶이 팍팍하게 느껴지는 어느 한 시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의자처럼 약간 기울어져도 괜찮습니다. 다 끝난 것 같다고 여겨지겠지만 진짜 삶은요. 기울어져서 털어낸 후 제자리에 섰을 때 또다시 시작되기도 하는 거니까요. 한낱 플라스틱 의자도 '바로 서기'를 하는걸요. 우리의 '기울어짐'은 '바로 서기'로 나아가는 중간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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