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1. 남편 와이셔츠 다리기
일요일 저녁, 식구들은 월요일을 핑계로 각자의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는 저녁 식사 후
나도 설거지를 끝내 놓고 소파에 편하게 드러누워 생각 없이 낄낄거릴만한 뭔가를 보고 싶다.
그러나 움직이는 몸의 항상성을 이용해 주방에서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 장롱문을 열고 남편의 주글주글한 와이셔츠 열 장을 한 손에 스윽 쓸어 내온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십만 원이 넘게 주고 산 서서 할 수 있는 다리미판을 펼치고 한쪽 다리가 들떠서 다림질할 때마다 움직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얇은 책 한 권을 다리 밑에 끼운다.
무선다리미에 정수기 물을 채워 열을 닿게 하고 열 장 중 제일 쭈글거리는 놈부터 다리미판에 눕힌다.
다림질을 따로 배운 적은 없다.
친정엄마는 뜨겁다고 다리미를 만질 때마다 나를 가까이도 못 오게 하셨다.
그냥 묵묵히 쭈그리고 앉아 다림질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이십 년 동안 보다 보니 대충 엄마의 몸짓을 따라 하는 정도다.
다림질을 할 땐 늘 역사저널 그날, 혹은 선을 넘는 녀석들을 틀어 놓는 걸 잊지 않는다.
육체노동을 하고 있으나 두 귀는 지적 허세를 채워야 하므로.
열 장을 한꺼번에 하는 이유는 일주일에 다섯 장씩 2주간 다림질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공휴일이 들어있거나 휴가가 들어있는 주간은 추가로 더 쉴 수 있어서 마음이 여유롭다.
세상 귀찮고 하기 싫은 가사노동 중 하나이지만 굳이 세탁소에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하는 이유는 장당 가격도 상당하지만 남편이 언제까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할지 길어야 십 년 정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 정도면 거뜬히 해줄 수 있지.
2. 아이 공부 봐주기
인내심의 한계에 미치기도 전에 내 화가 오르는 스피드가 가히 폭발적이라서 아이도 나도 눈물바람으로 끝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자식한테 공부 가르쳐주는 거 아니라고 법륜스님이 딱 잘라 말하셨다.
그래서 애써 옆에 앉혀서 하나부터 열까지 봐주고 문제집 채점하고 다했나 안 했나 감시하고 통제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필요하다 생각되는 과목을 가르치는 학원을 수소문해 하나씩 넣어주다 보니 일곱 살 아이가 일곱 개의 학원을 다니고 있던 적도 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내가 자신 있는 영어문법부터 가르치는데 아이가 맹한 것 같은 느낌에 “너 엄마 하는 말 알아먹겠어? 잘 따라오고 있어?”라고 묻는데 아이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내가 내 새끼라고 너무 과대평가를 한 결과다.
내 새끼는 이까짓 영문법 금세 이해하고 문제집 쭉쭉 풀고 세 권짜리 문법 완성 문제집 여름방학 안에 끝날 줄 알았지.
근데 웬걸.
하루에 한 장도 버거워하는 이해력, 영어문법에 대한 명료한 해석이 되지 않는 미성숙도로 인해 아니 솔직히 말해 가르쳤다 안 가르쳤다 하는 엄마의 불연속적인 학습으로 인해 세 권짜리 문제집은 삼 년이 넘게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러나 머리통 더 굵어져 내 말은커녕 내 옆에 오기도 싫어할 그날이 오기 전에 아이 공부를 봐주는 달콤 쌉싸름한 시간을 좀 더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궁금해하는 점은 옆집 아이라고 생각하고 친절한 미소와 목소리 장착한 채 최선의 열과 성으로 해결해주고 싶은 열망이 있다.
아직은.
3. 아이랑 놀아주기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가 뭔지 나도 남편도 안다.
바로 한번 시작하면 누구 하나 파산하기 전까지는 마려 오는 똥도 참아야 할 만큼 엉덩이를 떼지 못하는 “부루마블”이다.
아이가 여섯 살 때부터 돈 세는 법과 덧셈 뺄셈의 개념을 게임을 통해 가르쳐야겠다며 남편과 합심해 도입한 이 게임이 이제는 우리 부부가 아이의 머릿속에서 빼내고 싶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일단 시작하면 기본 세 시간을 바닥이건 테이블이건 게임판 앞에 앉아야 하는데 만성 디스크를 달고 사는 우리 부부는 그 시간이 정말 고통스럽다.
거기다 남편은 두 시간에 한 번은 전자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니코틴을 주입하지 못할 시 버럭 화를 내는 경우를 당했기 때문에 두 시간 정도 후에는 자체적으로 십분 정도 휴게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남겨진 나는 아들에게 핫도그를 레인지에 돌려주거나 하는 등의 시녀노릇을 해야 한다.
그래서 부루마블은 아이가 정말 하루 종일 온순한 양처럼 시키는 숙제나 독서를 군말 없이 해내고 부루마블 게임을 제안해왔을 때 우리 부부 둘 다 그의 노고를 충분히 인정하고 우리의 체력과 마음이 기꺼이 응할 수 있을 때가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질 때 가능한 게임이다.
그래서 일 년에 몇 번 못한다.
스마트폰에 저장한 오래된 동영상을 돌려보다 보니 아이와 팽이를 돌리며 유튜버 놀이를 한 영상이 있었다.
다섯 살 아이는 귀여운 입에서 나오는 귀여운 말로 놀이 유튜버들의 말들을 능숙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의 내 모습과 내 말들이 낯설게 비치고 있었다.
엄마로서 그땐 이렇게도 놀아줬었구나.
아이의 눈높이에 나름 맞춰주곤 했구나 하는 새삼스러움.
아이의 세상에 아직 엄마가 전부일 때 더 놀아줘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2022.8. 엄기.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