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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Aug 29. 2022

여전히 난 루저인가?

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1. 머리가 멍청한 죄로.


첫 직장은 외국어를 할 수 있고 회사에서 나누어준 매뉴얼대로 입만 나불대면 되는 단순노동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때 사귀던 남자 친구는 내게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 같다.

'넌 좋겠다. 퇴근하면 머리도 셧다운 될 수 있어서'

그때 나는 나보다 복잡하고 고귀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그의 직업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퇴근해서 가끔 멍하니 업무 생각에 빠져 한숨을 쉬는 그를 위로하기에 바빴다.

함께 저녁을 먹는 식당에서도 그의 눈치를 봐가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너무 배고프지만 또 너무 게걸스럽게 '처'먹는 모습을 보이면 그가 화를 낼까 봐 조바심 내며.


두 번째 직장은 드라마 '미생'이 딱 알맞은 분위기랄까.

무엇보다 나는 그곳에서 여자 '장그래'였다.

그래서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누구보다도 마음이 불편했다.

나를 보는 것 같은데 그것을 들킬까 봐 보는 내내 나도 다른 이들과 같이 장그래에게 측은함을 느껴줘야 했다.

그곳에서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이 세상에 내가 없으면?'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플랫폼에서도 영화 '비트'에서 만년 2등짜리 학생이 선로로 뛰어든 모습을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하고 있었다.

열심히 안 한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 같았고, 열심히 해도 성과가 안나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고, 슬렁슬렁 회사에만 왔다 갔다 하는 옆팀 동료가 밉기도 했다.

월요일 아침 회사에서 한 시간이나 먼저 주간회의를 하는 우리 부서가 싫었지만 딱히 나를 원하는 부서도, 내가 갈 수 있는 부서도 마땅치 않았기에 그저 묵묵히 출근 태그를 찍으러 다녔다.

숫자를 다뤄야 하는 곳에서 숫자에 민감하지 못해서 눈치를 봐야 했으며 엑셀이 서툴러서 경리업무를 담당하는 사원한테도 무시를 당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회식자리에서 쏘맥을 잘 말아마시는 것이었다.


2. 성격이 별로인 죄로.


머리가 멍청하면 성격이 좋거나 인물이 훤칠하거나 아니면 부모가 장관이거나 하면 회사에서도 열 번 찍어 내릴 걸 그냥 툭 건드리고만 말더라.

그러나 나는 머리도 그럭저럭, 인물도 중간, 부모도 평범, 그리고 성격마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터라 일을 못하거나 성과가 안 나면 먼저 쭈그리 모드가 되어 모니터 뒤에 숨어 있다가 부장님이 호출하면 죄지은 사람처럼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죄송합니다만 중얼거리게 된다.

그러다 기계처럼 죄송하다는 말을 튕겨내듯

"죄송하면 다야? 죄송하면 어쩔 건데?"

라며 반문을 당하는 날엔 더더욱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더 수그린다.

회색 벽 안에 회색 캐비닛 회색 데스크들이 죽 늘어서 있는 그 넓지만 폐쇄적인 사무공간에서 여자애 하나가 몇십 분 동안 말로 얻어터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고개를 들어 위로의 눈빛조차 보내주지 않는 그 삭막함이 지금도 뼈까지 시리게 사무친다.


"원래 저인간 저렇잖아. 그냥 잊어버려"

내가 만약 흡연자였다면 속상한 마음 달래러 회사 건물 앞 주차장에서 동료들이 내주는 담배 한 개비를 받아 들고 토해내듯 뱉은 연기와 함께 훌훌 털어냈을 텐데...

가끔 같은 여직원 동생이 사주는 커피 한 잔에 눈물이 핑도는게 내 자신이 부끄러워선지, 내 자신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걸 매일 증명해 보이는 현실이 싫어선지 몰랐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다면 큰 목소리로 "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하고 씩씩하게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텐데...

그렇지 못한 나는 자존심만 세서는 끝까지 앞으로 잘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은 부장님의 기대를 늘 져버리고 자리로 가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만 한번 푹 숙이고는 자리에 와 앉아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회색 공간에서 더 짙은 회색의 가까이하기 싫은 존재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 같다.


3. 게으른 죄로.


뭔가를 이루겠다는 목표의식도 흐물 해진 지 오래다.

그저 허울 좋은 옷만 입고 남들이 멋대로 나에 대해 '좋게' 판단하기를 기대하며 뭔가 봉사나 업무가 주어지는 것에 따르는 고뇌나 수고로움은 무시하고 살고 있다.

그러다 나의 무지함과 나태함 그리고 생각보다 별로임이라는 딱지가 붙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저 여자 왜 저래?'

라는 말을 들을까 봐, 아니 그런 생각들을 할까 봐 애써 태연한 척, 애써 쿨한 척 실수를 해도 바로바로 죄송하다고 공개적으로 사과를 해버린다.

그러나 나 자신은 안다.

난 여전히 멍청한 데 게으르기까지 해서 업무를 이끌어가는 추진력과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섣불리 사업을 시작한다던가 단체에서 중요한 장을 맡아 일을 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일로 다가온다.

내 밑천이 십원 짜리 동전만큼 얄팍하고 우스운데 그것이 까발려지는 순간 나의 못된 성격이 방어기제로 작동해서 인간관계까지 망쳐지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고 남들이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굳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내 멋에 취해 사는 게 나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게으르고 입과 손만 살아서 그때 그때 펼쳐지는 상황만 파도타기 하듯 넘겨버리고 더러운 잔상은 뭉게 버리는 것.

그게 바로 나라는 루저라는 걸 오늘도 실감하며 아직도 그렇게 불편한 마음 한 켠에 담아놓고 지내야만 한다.


결혼해서 애 낳고 나이 먹으면 뭔가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2022.08. 엄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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