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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Sep 01. 2022

텅 빈 손

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1. “오늘만큼은 아이에게 상냥한 엄마로 시작하자.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을 먹고 일어난 관계로 아이를 깨울 때 처음엔 세상 달달한 목소리로 '우리 아기 이쁜 아기' 혹은 '왕자니임~ 일어나세요 왕자니임~' 해가면서 솜털 가득 빵빵한 볼에 뽀뽀를 해가면서 아이 엉덩이를 만져주고 토닥토닥으로 깨우기 시도한다.

그럴수록 아이는 머리를 베개 맡에 더 숨기고 학교 가기 싫다며 더더더 자려고 든다.


아침에 아이를 깨우는 것도 하나의 과제가 되어 버린 나날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혼자 6시면 벌떡 일어나 온 집안의 고요를 깨고 다니던 아이가 여덟 살이 되자 8시가 넘어도 일어나기 힘들어한다.

아이가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만큼 엄마가 깨우는 것도 힘들어진다.


몇 번 더 깨우기 시도하다가 안되면 애착 인형 '뀨'를 인질로 삼아 거실로 나간다.


"안 일어나면 뀨는 이제 없는 거야!"


그것마저 안 통하면 호통을 치고 만다.

그러면 아이는 소파로 기어올라가 다시 잠을 청하다 아침식사 콜에 끌려 나와 식탁에 비몽사몽 앉아 짜증을 내며 무슨 맛인지도 모를 아침식사를 하는 식이다.


다 좋다.

어느 집이나 다 그럴 테지.


그러나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아이와 나와의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그리 한결같지 않은 요동치는 정서의 소유자인 엄마인 이유로 아이에게 한 없이 잘해주다가도 뭔가 맘에 안 들면 아이에게 버럭 혼을 내는 못난 모습을 보이고 만다.

학교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꾸무적거리는 모습에 왕자님 시중들던 시녀는 한순간에 이글거리는 눈을 한 마녀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2. 8차선 도로를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는 단지에 살았던 시절, 매일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데 입학초에는 나를 비롯한 다른 엄마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네주는가 싶더니 한 두 달 지나니까 아이들이 그냥 혼자 다니게 하는 추세였다.

그래도 꿋꿋이 내 새끼 사고 날 까비 아침에 세수는커녕 양치도 안 하고 모자 눌러쓰고 아이손을 잡고 학교까지 바래다주었다.


1학기를 그렇게 보내고 2학기가 되었다.

이제 동네에 엄마랑 학교 같이 가는 애가 우리 애 포함 한두 명.

그날 아침은 엄마랑 가는 애는 나랑 우리 애 둘 뿐이었다.

뒷동에서 나온 같은 반 꼬맹이들이 엄마 없이 가는 걸 보고 혼자 나지막이


"얘네도 혼자 가는구나"


라고 속으로만 생각해야 할 말을 나도 모르게 입으로 내뱉어버렸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쏘머즈 귀의 소유자 아드님이 돌연


"왜! 나만! 엄마랑 다녀야 하는 거야!!!!!!! 나도 혼자 다니고 싶어!!!!"


내 조동아리가 주책이다.

안 그래도 혼자 주체적으로 뭐든지 하려는 기질의 아이인데...

아이는 늘 먼저 습관적으로 엄마손을 '찾아 잡던' 그 손을 내게 주지 않으며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나와 발맞춰가는 것 마저도 거부했다.


"엄마손 잡아야지. 너 계속 이럼 나중에 후회할 날이 있을 거야."


아.... 뭐 이런 유치뽕짝 엄마가 다 있을까.

아이는 이런 식의 협박에는 이미 익숙한 터라 꿈쩍도 안 한다.


"xx이가 엄마손도 안 잡아주고 엄마가 잡아도 놔버리니까 정말 마음이 아프고 슬프네"


슬퍼하는 듯한 감정을 담아 달래듯 말해도 아이는 흔들림 없이 혼자 걸어간다.

횡단보도 신호등에서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아이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나를 원망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요새 들어 자꾸 눈에 힘을 주고 반항하는 모습이 보이길래 순간적으로 큰소리로 '어디 엄마한테 그런 눈을 하냐'라고 호통을 쳤다.

아이는 엄마한테 혼나는 것 보다도 큰소리로 사람들 들리게 혼나는 사실이 더 창피한 눈치다.


잠시 눈빛이 흔들리듯 하더니 나를 보고 붕어같이 겨우 입만 열어


"같이 가"


라고 속삭인다.

약간 속이 상한 유치한 나는 횡단보도만 같이 건네고 아이를 혼자 학교까지 올려 보냈다.

하늘도 파랗고 햇살도 좋고 지각은 했지만 평화로운 가을 아침 등굣길이라 아이와 함께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면서 행복한 아침을 기대했던 게 너무 컸었나.

아이가 혼자 학교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걸 뒤에서 지켜보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뒤돌아서서 냉정하게 '나쁜 놈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씩씩거리며 집으로 와버려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내 두 눈은 아이를 찾고 있다.


3.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아이가 교문 앞에 다다르더니 갑자기 메고 있던 책가방을 뒤진다.

직감으로 아이가 내게 전화를 할 거라는 걸 알았다.

역시나 아이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왜?"


마음 같지 않게 퉁명스럽게 받아버린 전화.

방금까지 싸웠는데 갑자기 목소리 변해서 받으면 나도 좀 사이코이지 싶어서.

아들이지만 엄마 자존심도 세워야지.


"........................"


아들은 당황을 한 건지 말이 없다.


"학교 아니야? 학교에서 전화할 수 있나?"

"학교 앞이에요. 이제 들어가야 해요"

"왜 전화했어? 미안해서 사과하려고 한 거야?"

"............... 네"

"뭐가 미안한데?"


나... 뭔가 남편 혹은 젊은 시절 남자 친구랑 싸울 때의 전화통화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변하지 않은 여자인 건가.


"싫다고 한 거, 엄마 싫다고 한 거요"


가슴속에서 갑자기 울렁거리는 무엇인가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눈물샘을 자극했다.

얽혀버린 실타래처럼 스무스하게 이어가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너와 나의 관계라는 게 너무 서글퍼.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고

모든 게 또 내 탓인 것 같다.


아이는 혼자 올라가는 내내 엄마가 '네가 손을 잡아주지 않아 슬프다'라고 한 말을 생각했을 것이다.

본인이 엄마랑 같이 손잡기도 싫다고 안 잡아준 행동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 가기 전에 엄마에게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내 아이가 이렇게 비단결 같은 마음을 타고난 채 이 세상에 태어난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미처 아이보다 자존심 편에 서버린 마흔 살 넘은 못난 여자인 내가 참 그렇다.


혼자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비친 내 그림자를 보니 이제 홀로서기를 하는 아이의 손목을 잡고 질질 끄는 내가 보였다.

두 사람의 그림자였던 그 길에서 이제는 홀로 남겨진 채 갈 곳 없는 텅 빈 왼손이 더욱 서글프게 느껴진다.

오동통하고 폭신 거리며 좋은 살냄새가 나는 아이의 하얀 손이 빠져나간 텅 빈 손.

씁쓸하지만 언젠가는 이 날이 올 거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지금 이 순간, 아이의 손을 잡았던 그 따스한 온기가 그리움으로만 남을까 봐 두려워진다.


아이가 오면 그 좋아하는 컵라면을 하나 꺼내서 끓여줘야지 하는 마음을 먹어 본다.

우연히 접해 읽게 된 김수경 작가의 "아들과의 연애를 끝내기로 했다"

그 책이 더욱 곱씹어지는 가을 아침이었다.



2022.9.1 엄기.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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