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핫! 잡았다 요놈!”
한여름이 지나가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책방 안의 공기도 순환시키고 화분들도 숨좀 쉬게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랬더니 언제 들어왔는지 말벌 한 마리가 큰 통창 위에서 윙윙거리며 자꾸 몸을 부딪힌다.
말 벌 쯤이야 종이컵 하나만 있으면 맨손으로도 잡을 수 있는 아줌마다.
아이가 세 살 때 도로 경계를 해두던 플라스틱 통을 건드리는 바람에 그 안에 벌집을 만든 벌들이 화가 나 아이 등을 콕하니 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15킬로가 넘는 아이를 번쩍 들어 안고 큰 길가까지 죽어라고 달려 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택시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아이는 아파서 우는 건지 놀래서 우는 건지 점점 더 데시벨을 높여가며 빽빽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고 나는 흡사 미친년처럼 차들이 다니는 도로까지 내려와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는 택시를 납치하듯 잡아탔다.
“아… 아저씨! 헉헉.. 대학병원! 응급실! 벌에 쏘였어요!”
호흡이 딸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 딸린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듯 아저씨는
“애엄마, 조금만 진정해요. 엄마가 차분해야 아이도 안 놀래지.”
그 말을 듣고 나니 아이는 놀라서 거친 호흡을 쏟아내는 나를 쳐다봐가면서 더 울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아 보였다. 수많은 육아서적에서 친절히도 가르쳐준 ‘아이가 다칠수록 엄마는 더 침착해라’를 그제서야 떠올렸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등록시키고 의료진이 우리 아이부터 봐줄 수 있게 나로서는 제일 큰 목소리로 아이가 벌에 쏘였다고 다급하게 증상을 말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의사 선생님은 책받침 같은 걸로 쏘인 곳을 쓱쓱 밀어내곤 알레르기 검사 같은 걸 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나도 아이도 진정이 되어 그제야 응급실 귀퉁이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아 환자들을 둘러봤다.
의식이 없는지 간호사가 연신 불러도 대답 없는 아저씨, 배가 아프다고 한쪽으로 구부려 누운 청년, 아까부터 울어재꼈는데 이제야 들려오는 내 아이 또래의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
그 가운데 우리 모자는 비교적 평온함을 유지한 채 별다른 증상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도 좋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반신반의하며 응급실 이용료를 치르고 집에 갈 채비를 했다.
“보호자님, 다음부터 벌에 쏘이면 일단 가지고 계신 카드로 한번 쓱 긁어보세요”
의료진 중 한 분이 해준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에 또 벌에 쏘일까?’
생각보다 벌들이 주위에 많았다.
아파트 화단에 핀 하얀 꽃들에게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다가갔다가 벌들의 향연을 보고 화들짝 놀라 자빠질 뻔한 적도 있다.
책방에 들어온 저 벌은 어디서 온 건지 엄지손가락만큼 큰 말벌이다.
종이컵을 가져와서 물뿌리개로 정신없게 만든 다음 움직임이 잦아들면 종이컵으로 유리창에 착 붙인 다음 아래로 끌어내려 종이컵이 바닥에 닿게 놓아둔다.
말벌이 나가고 싶어 안달인 듯 종이컵이 움직이지만 어림없다. 더 무겁게 물적신 화장지를 위에 놓아둔다.
그리고 물 뿌리게로 마구 물질을 한 유리창을 마른행주로 닦기 시작했다.
큰 통창에 달라붙어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버리게 투명한 유리창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삭삭 닦다가 트램 거리 중간에 이정표처럼 세워진 시계탑으로 눈길이 갔다.
책방 소파에 앉아서 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시계탑은 늘 시간이 정확히 맞는 편이라 신뢰감이 가는 시계탑이다.
두 명의 아줌마가 휴대용 수레를 끌고 걸어오더니 어색한 고개 인사를 한다.
‘당근 하는구먼’
몸짓만 봐도 당근인지 친한 사이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철이 바뀌거나 새 학기가 시작되는 무렵엔 나도 사장님도 당근을 하느라 정신이 없기에 어색한 몸짓 하나하나가 당근의 표상이 된다.
검은색 경량 점퍼를 입은 여자가 끌고 온 수레를 다른 쪽 여자에게 내보이며 허리를 숙인다.
그러자 다른 여자도 함께 허리를 숙여 손을 뻗어 물건을 집어 든다.
“마법천자문 시리즈’
엊그제 55권이 나왔다고 우리 아들도 사달라고 언뜻 말했던 불멸의 학습만화 시리즈다.
뜨문뜨문 사줘서 집에 몇 권 없는데 수레 한가득 싣고 온 저 아줌마는 아마 전권을 다 소지라도 한 듯 짐짓 당당한 모양새다.
두 여자는 한쪽 수레에서 다른 쪽 수레로 책을 옮기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대부분 아이가 몇 학년이냐, 글밥 많은 건 안 보고 맨날 요런 만화만 본다는 엄마들 대화가 오갔을 것 같다.
수레에 책을 다 채운 여자가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어 건넨다. 봉투를 건네받은 여자는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으며 황급히 서로 인사를 한채 한 명은 12시 방향. 한 명은 9시 방향으로 걸어가기에 바쁘다.
넋 놓고 위에서 쳐다보고 있단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고개를 돌려 이미 물기가 다 말라 깨끗해진 유리창을 닦아본다.
괜스레 찔리는 마음에 더 움직임을 크게 해서.
우리 책방에도 학습만화 시리즈를 판매하고는 있다.
‘흔한 남매 시리즈’나 ‘포켓몬스터 시리즈’ 그리고 ‘전천당 시리즈’ 등이 대표인데 나 같은 경우는 그냥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있는 시리즈만 보게 하고 책을 잘 사주지는 않는 편이다.
책방 알바를 하는 지금도 만화 시리즈물은 가급적 빌려보게 한다. 책을 사주는 기준이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만화 시리즈는 정말 아이가 너무 원하지 않는 이상 구매 대상에서 일 순위로 제외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상을 받았다는 글밥 많은 책이나 교훈을 주는 고전책등은 책값을 지불하는 게 아깝지 않다.
가끔 책방을 들르는 엄마들이 학습만화 신권이 나오면 한 권씩 사서 꽁꽁 숨겨놓고 아이가 칭찬받을만할 때 상처럼 하사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들의 눈빛을 본 적이 있는가!
유난히도 반짝이는 두 눈에 웃음 가득 담아 엄마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그리고는 곧장 책 한 권을 앉은자리에서 뚝딱 읽어내 버린다.
반면, 얼마 전 상을 받았다는 베스트셀러 한 권을 아이에게 쓱 내밀었는데 아이는 한 챕터도 아니고 한 페이지씩 억지로 억지로 읽더니 한 달이 넘어서야 한 권을 겨우 끝냈다.
독서록을 쓴 걸 보니 ‘이 책은 우리 엄마가 읽으라고 해서 읽게 되었다’로 시작된 것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아직 아이가 어리고 착해서 엄마가 주는 대로 읽지만 책에 대한 취향이 확고해지면 노벨상 할아버지가 쓴 책이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씁쓸하지만 아이에게 완독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할 따름이다.
“엄마, 설민석 읽으면 안 돼요? 시간이 없어서 빨리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오늘 아침 식사시간에 설민석 작가가 지은 만화로 된 한국사 시리즈를 집어오며 아이가 먼저 제안했다.
엄마가 권하는 글밥 많은 소설보다 가볍게 후루룩 읽기에 학습만화만 한 게 없나 보다.
“응! 당연하지. 뭐든 읽어. 읽으면 하나라도 남으니까”
학습만화건 뭐건 아이가 글을 읽는 것에 대하여 흥미를 잃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것으로 엄마는 만족하기로 했다.
설민석 한국사 시리즈는 역사물이라서 나오는 족족 사주는 데에 망설임은 없어선지 집에 꽤 많이 쌓여있는 걸 볼 때마다 언젠가 저책들을 싹 쓸어담아서 당근해야겠다고 다짐한다.
2022.10.24 엄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