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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Sep 13. 2022

저기요! 혹시….

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가을이 되면 버건디 색상을 자연스레 떠올린다.

‘버건디’라는 색상의 이름을 안 지는 십여 년 전쯤일 것 같다.

습관적으로 백화점 1충을 한 바퀴 돈 후에야 집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백화점 1층은 특별함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커다란 회전문을 살짝 힘을 줘서 앞사람과 겹치지 않게 내 발걸음이 문에 거슬리지 않게 긴장해야 하는 거창한 문을 통과하면 열리는 또 다른 세상.

마치 우영우가 ‘쿵 짝짝 쿵 짝짝’ 왈츠 리듬에 맞춰서 조심스레 휘말리지 않고 바깥세상에서 안쪽 세상으로 안착하면 미지의 세계가 짜잔 하고 펼쳐지는 것이다.

수백 가지의 향수가 공기 중에서 떠돌다 지들끼리 만나서 “백화점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기가 막힌 향수로 후각을 후린다.

일단 향에 취한 뇌는 일순간 돈을 움켜쥐고 놓지 않겠다는 의지력을 상실시킨 채 이곳에 몇 푼의 돈이라도 풀고 가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더 매력적이고, 더 자극적이고, 더 우아해 보이는 것들만 좇아 눈을 현혹시키고 만다.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이 매트하게 발린 립스틱을 강조하며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입술을 똑같이 만들어버리겠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한껏 포즈를 취한 매장을 지나고 있었다.

검정색 쫙 붙는데 딱 떨어지는 정장 바지에 검정색 블라우스를 멋지게 입고 살짝씩 드러나 보이는 가슴 근육이 섹시하기까지 한 남자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혹시…?!?!”


여자는 육감으로 안다.

아무리 현빈처럼 잘생긴 남자가 나를 아는 체 할리가 만무하겠지만 길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이 콕 집어서 나에게 말을 거는 건지 아닌지는 내 뒤통수와 옆통수가 이미 다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살짝 뇌에 찌릿하는 아기 번개가 내리친 기분이 들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서야만 하는 강력한 의지가 샘솟았다.


“저요?!”


샤랄라 하게 자체 슬로를 걸면서 우아하게 뒤돌아보며 눈꼬리를 치켜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우와! 내 생애에 이렇게 조각같이 생긴 남자가, 나보다 열댓 살은 족히 어려 보이는 청년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심지어 눈에는 웃음이 그렁그렁 맺힌 눈동자로 내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몸이 쭈그러드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태연하게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심장이 털썩 쿵! 내려앉기가 무섭게 이성이라는 놈이 잽싸게 두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복장이 딱 보니까 백화점에서 얼굴마담으로 샘플 나눠주는 사람이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

그렇다. 내가 무슨 단체 미팅 가서도 한쪽 귀퉁이에 가만히 앉아서 커피만 홀짝거리다 나와도 몰표를 받는 마성의 ‘옥순이’ 같은 외모도 아니고 젊은 남자가 갑자기 말 거는 데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며 일순간 방어기제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시간이요? 왜요?”


소싯적 ‘좀 놀던’ 친구가 오락실에서 교복 입고 넥타이를 목 뒤로 넘긴 채 열심히 철권을 하는 모습에 반해서 대뜸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단다.

철권에 심취한 십 대 소년은 모기가 지나간 건지도 모를 스킨십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게임을 하길래 친구는 과감히 그 남자애의 왼쪽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저기요. 시계 있으세요?”


깜짝 놀란 십 대 열혈남아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에서 잠시 이탈하고는 불시에 왼쪽 귀를 잡아먹은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대답했다.


“네… 있어요”


그러자 친구는 그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시간은 있으세요?”


다분히 끼가 많은 친구라 그런 멘트를 날릴 수 있다고는 쳐도 새치 혀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전설 같은 이야기에 헛웃음이 나오곤 했다.





남자는 내 쪽으로 오더니 허리를 살짝 굽히며 한 손을 뻗어 내 어깨 위로 올리더니 한 매장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 움직임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 호위무사처럼 여겨지는 그의 품을 원격으로 느끼며 자연스레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저희 신제품이 반응이 너무 좋아서 내방하시는 분들께 직접 발라드리고 할인까지 해주는 행사가 있는데요, 이 제품이에요. 너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아.. 네..”


정신을 차리고 매장을 둘러보니 나처럼 멋진 남자에게 홀려 발길을 들였다가 조명이 박힌 거울 앞에 앉아 얼굴을 내주고 있거나, 조용히 계산을 하고 있는 여자들이 보였다.

아마 나도 곧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고객님 얼굴색이 하얘서 이 제품이 더욱 어울릴 것 같아요. 한 번 발라드려도 될까요?”


지금이야 웜톤, 쿨톤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때는 하얗거나, 누렇거나, 까무잡잡으로 피부 스펙트럼이 간결하던 시기였다.

남자는 수 십 개의 립스틱이 진열된 매대에서 하나를 콕 집어 내 눈앞에서 립스틱을 끝까지 돌려 색상을 확인시켜주었다. 난생처음 보는 색은 아니었다.

아주아주 어릴 때 울 엄마가 화장을 하실 때 입술선을 따라 연필로 선을 따셨는데 그 선 안에 색칠놀이하듯 다른 색 립스틱을 채워 넣곤 하셨다.

딱 그때 그 연필 색 같은 먹먹하고 진한 색의 립스틱을 남자는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 입술을 원하고 있었다.


“네.. 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 의자같이 생긴 높다란 의자에 나를 앉히고 긴 다리를 굽혀 매너다리를 만든 뒤 내 얼굴 바로 앞에서 입술을 향해 돌진할 준비를 하였다.

먼저 내 입술에 얹힌 것들을 걷어내기 위해 가차 없이 리무버 묻힌 솜으로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아이고, 입술 각질은 꼭 제거를 해주셔야 립스틱 색이 제대로 발현되거든요. 수분 섭취 많이 하셔야겠어요”


‘젠장… 하필 이남저 앞에서 각질이 밀려 나오고 난리람.’

부끄러움이 밀려왔지만 또 대답은 잘하는 성격이라 애매하게 벌리고 있는 입술을 통해 예라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얀 손 등에 립스틱을 덜어낸 뒤 정성스레 립 전용 솔로 골고루 묻힌 뒤 내 입술로 돌진하는 남자의 손.

순간순간 눈이 마주치는 게 그 또한 부끄러워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가 하다 보니 벌써 다 됐다는 듯 입술 주변을 퍼프로 톡톡 정리해주는 손길이 싫지는 않았다.


손거울을 가져와 보이며 남자는 말했다.


“가을 느낌 물씬 나죠. 버건디라는 색인데 말린 장미꽃색이에요. 고객님께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거울 속 내 하얀 얼굴은 온통 입술만 둥둥 떠 있었다.

입이 얼굴 면적에 비해 작은 편이라 가급적 입술을 부각시키는 화장은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모습은 난생처음 엄마 화장품을 몰래 훔쳐 바른 소녀마냥 뭔가 잔뜩 노화해버린 느낌이다.


‘버건디? 버건디가 뭣인디?’


순간적으로 입술색을 연하게 하고 싶은 본능에 위아래 입술을 부딪혀 보았다.

연해지기는 커녕 애써 예쁘게 발라놓은 립스틱이 윗입술의 선을 흐려놓아 흡사 짜장면을 먹은 여자 같아졌다.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만 한다.

나의 탈출 본능이 급 시동을 걸었다.

미끄러지듯 의자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입술을 다시 보았다.


“오늘 구매하시면 10프로 할인도 가능하세요. 가을엔 버건디만 한 게 없죠. 우아하면서도 매력적인 색이에요”


굳이 물건을 구매하지 않을 매장에선 금액을 물어보지는 않는다.

금액이 비싸서 안 사는 것 같은 초라함을 남기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제품들을 슬렁슬렁 둘러보는 척하며 다시 거울을 보았다.


“넘 진한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 인척 들리게끔 말하며 안 살 의사를 표현했다.

솔직히 너무 진하다.

이걸 바르고 회사에 가면 부장님 눈초리가 따가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늙은 라테 아저씨들은 지나가면서 소를 먹었니 쥐를 먹었니 하는 시답잖은 말로 비아냥거릴 게 분명한 색이었다.


“음… 지금 굉장히 세련돼 보이세요^^ 별로 진한 느낌은 없는데?!”


어리고 잘생긴 남자가 좋은 말을 해주고 반존대까지 섞어가면서 친근감을 표시해주어도 버건딘지 뭔지 하는 색깔이 얼굴에 묻어 있는 한 입술을 빨아가면서라도 빨리 색깔을 연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해버린 후라 그의 눈웃음에도 가슴이 저릿하지 않았다.


“하하… 그래요? 일단 생각해볼게요!”


“그러실래요? 그럼 시간 나실 때 들어주세요^^”


생각보다 쉽게 나를 놔주는 그,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 서비스 정신 투철한 그의 시선을 뒤로한   뒤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저녁나절이 된 공기는 더욱 가을의 선선함과 사이다 같은 청량함까지 더해 나에게 쓰나미처럼 덮쳐 들었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책방에 출근한 지 석 달째

여름에 오픈하고 불쑥 가을이 방문하더니 새벽 공기가 쌀쌀하다 못해 춥다.

남편의 이른 출근을 시작으로 아이 등교까지 마치고 고양이 귀속 정리까지 해놓고 나면 그제야 바닥의 먼지와 머리카락이 보인다.

빨래를 돌려놓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 출근 준비를 한다.

도보로 10분, 차로는 5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그 짧은 출근길이 더없이 아름다운 가을의 초입이다.

반팔은 좀 쌀쌀할까 싶어 잘 열지 않던 장롱문을 열었다.


장롱 한쪽에 걸려있는 말린 장미꽃색 차르르한 미디 길이의 블라우스를 잡아 꺼내었다


“그래, 가을은 버건디지!”




2022.9.13. 엄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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