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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08.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19

세비야 2


세비야의 돈키호테



세르반테스 동상을 뒤로하고 접어든 뒷골목 아무 야외테이블에나 앉았다. 관광지에서 멀지 않은 그곳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곧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종업원 사내가 내게 다가왔다. 안달루시아 지방은 스페인에서도 무어인의 지배를 오래 받은 대표적인 지역이다. 그래서일까, 그에게도 무어인의 피가 흐르는지 아랍계 미남의 인상이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그에게 스페인어로 '까냐 삔따'와 '또르띠야'를 주문했고 그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곤 돌아갔다. 까냐는 생맥주고 삔따는 영어의 파인트 즉 큰 잔을 의미한다. 또르띠야는 이곳에 와서 하루에 한 번은 먹는 감자 계란 오믈렛으로, 우리로 치면 계란말이 반찬 정도다. 이제 자주 먹는 음식의 주문은 스페인어로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고 관광지의 스페인 사람들은 영어를 곧잘 하지만 띄엄띄엄이라도 스페인어로 주문해줘야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내가 크루스캄포 까냐 삔따와 올리브가 담긴 작은 그릇을 들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크루스캄포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대표 맥주로 마드리드의 마오우 맥주보다 내가 정확히 두 배 좋아하는 브랜드다. 사실 둘의 맛은 카스와 하이트 정도 차이인데 아무래도 추억 보정이 되어서인지 신혼여행 때 먹은 크루스캄포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다. 서울에서도 맥주를 시키면 강냉이나 새우깡이 나오듯 이곳은 올리브가 기본으로 주어지곤 한다. 지중해성 작물인 올리브는 역시 스페인이 짱이다. 나는 스페인 올리브만으로도 맥주 2리터는 먹을 자신이 있다.


안달루시아의 흔한 크루스캄포 까냐와 기본 안주 (다른 날의 사진. 그날 까냐 삔따와 올리브는 급 섭취하느라 이미...)



사내가 내려놓은 까냐 삔따를 집어 들며 자연스런 미소로 ‘그라씨아스’라고 외치자 그가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스페인어로, 빠르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쏘리, 노 에스파뇰”이라 답함으로 ‘주문 스페인어’밖에 못한다는 걸 알려야 했다. 그러자 사내는 접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짧은 단어로 이뤄진 영어 문장을 구사하며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나 역시 영어로 짧게 답했다. 그는 처음에는 나와의 대화를 반겼으나 점점 황당해하다가 급기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세비야에 와서 대성당도 알카사르도 안 보고 세르반테스 동상만 봤다고 했기 때문이다. 대략 그와 나 사이에 오간 대화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유 프롬?”

“꼬레아.”

“오. 꼬레아.”

“사우쓰.”

“(눈웃음을 지으며) 메이비. 유 엔조이 세비야?”

“슈어.”

“웨어 유...?”

“파돈?”

“웨어 유... (생각났다는 듯 좋아하며) 비지트? 까떼드랄(대성당)? 알카사르?”

“(맥주 한잔 마시고) 아이 디든 비지트 데어.”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와이?”

“아이 비지트 온리 세르반테스 플레이스.”

“(눈을 크게 뜨고)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웨어?”

“(세르반테스 동상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오버 데어. 더 스테처 오브 세르반테스. (그가 여전히 갸우뚱하기에 폰에서 세르반테스 동상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디스.”

“(사진을 살피곤) 오. 아이 노우. 아이 노우. 소 유 나우 고 투 까떼드랄?”

“노. 아이 저스트 원투 시 세르반테스. 투모로우 모닝 아이 리브 세비야.”

“(어이없다는 듯) 와이? 세비야 이즈 빅 시티.”

“(그가 황당해하는 모습에 은근 재미를 느끼곤) 아이 엠 돈키호테 매니악. 소 아이 온리 원투 씨 세르반테스. 댓츠 잇.”

“(입술을 부르르 거린 뒤) 유 크레이지.”

“메이비.”

“(돌아갔다가 또르띠야를 가지고 와 내려놓으며) 유 리얼리 온리 시 세르반테스 앤 고?”

“예스.”

“왓 유 두...?”

“음... (직업을 묻는 듯하여) 아이 엠 노벨리스트.”

“뻬르돈?”

“(소설가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해) 롸이터. 아이 롸이트 노벨 라이크 돈키호테.”

“(그러자 입꼬리를 올리며) 오! 유 롸이터. 라이크 세르반테스.”

“예스 유 나우 언더스탠드?”

“예스. 벗 유 스틸 크레이지.”

“돈키호테 얼소 크레이지.”

“(고개 절레절레) 예스 유 돈키호테. 앤조이.”

“(몸 돌려 가는 그에게) 헤이. (그가 돌아보자) 모어 까냐. 뽀르 빠보르.”


사내는 유쾌했고 나 역시 가벼운 흥분감과 취기에 되는 대로 말을 던졌다. 외국어의 한계가 주는 여백이 둘 사이에 이해의 폭을 오히려 넓혔고 그는 그대로 진심을 나는 나대로 진심을 말했다. 짓궂게도 그에게 4년 전 이곳에 왔었고 대성당과 알카사르 모두 즐겁게 관광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그로부터 돈키호테 같다는 찬사를 들을 수 있었고. 나는 세 잔쯤 까냐 삔따를 비운 뒤 그에게 충분한 팁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오후에서 저녁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숙소를 알아보려 구글 지도를 펼친 채 이곳저곳 다녀야 했다. 갑작스런 여행이었지만 말라가와 론다는 용케 숙소를 구했다. 세비야는 아직도 마땅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에어비앤비는 대부분 만실이었고 호스텔도 상관없었지만 상태들이 매우 좋지 못했다. 대학생 배낭여행 족 시절이라면 호스텔도 감지덕지겠지만 이제는 사십 대 중반이다. 패기보다는 체력 세이브가 중요한 시기고 무엇보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나는 세비야 시내를 한 시간 여 헤맨 후에 간신히 유럽 저가 체인 호텔의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매우 탐이 났지만 가격의 압박으로 투숙할 수 없었던 '호텔 세르반테스'.



다행히 아직 햇살이 남아있었다. 나는 성냥갑 같은 방에 짐을 두고 어둠이 이 도시를 잠식하기 전 산책을 나섰다. 행선지는 숙소를 찾아 헤매던 중 지나친 어떤 서점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서점은 메트로폴 파라솔 부근이었는데, 지나치며 슬쩍 엿본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탐이 나는 공간이었다. 0층은 카페, 1, 2,3층은 서점으로 구성된 그곳은 관광객보다는 세비야 시민들이 죽치고 앉아 토론도 하고 수다도 떠는 공간으로 보였고, 서둘러 그곳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나는 언제 가도 기분 좋은 메트로폴 파라솔에서 노을 비슷한 것을 잠시 감상하고 곧바로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의 이름은 LIBRERIA CAOTICA였다. 카페 공간인 0층은 이미 북적이고 있어서 나는 맥주 한 병을 주문해 받아 들고 1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서가가 있었다. 책들 사이를 오가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숲에서 피톤치드가 나오듯 나무로 만든 책에서는 피톤치드 비슷한 게 나와 내 몸을 편안하게 다스려주는 것만 같다. 며칠 간의 분주하고 풍성했던 안달루시아 여행을 정리하기에 이곳이야말로 최적의 공간이었다. 서가 사이에는 매우 편해 보였으며 거기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은 의자가 놓여있었고, 나는 맥주병을 홀짝이며 그곳에 앉아 스페인어로 된 이야기 뭉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점원인 듯한 사내는 마치 날 투명인간 대하듯 자기 일만 하고 있었고 이방인의 자세로 유령의 모습으로 거기 거하고 있는 내 자신도 이루 평온하지 않을 수 없었다.


LIBRERIA CAOTICA(사진은 구글에서 빌려왔어요).



맥주를 다 비우고 일어났다. 내려가는 방향으로 향하던 나는 순간 매대에 세워진 동양 남자의 얼굴로 가득한 어떤 책의 표지를 목격했고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남자의 한쪽 눈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책의 제목은 EL BUEN HIJO. 그리고 책 제목 바로 아래 띠지에 적힌 저자의 이름은 YOU-JEONG JEONG.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며 책을 집어 들었다. 정유정 작가님의 <종의 기원>이었다. 이 책의 영문판 제목이 A GOOD SON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스페인어 제목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EL BUEN HIJO. 좋은 아들. 한쪽 눈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좋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스페인어로 묶인 채 그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정유정 작가님의 작품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되고 소개되어 인기를 끄는 것에 감사함과 부러움이 일었다. 나 역시 스릴러 <파우스터>를 집필하며 정 작가님의 행보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었고. 그래서일까, 스페인 세비야의 작은 서점에서 스페인어판 <종의 기원>을 마주하게 되니 기분이 참 오묘했다. 지난주 마드리드 프냑에서 김언수 작가님의 <설계자들> 영문판을 목격하고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마음이 훈훈해지다 못해 이국의 전장에서 전우를 만난 기분인 것이다. 이국 서점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떡하니 있는 걸 보면 무언가 엄호사격을 받는 기분인 것이다.


<종의 기원> 스페인어 판. LIBRERIA CAOTICA. SEVILLA.



소설을 쓰며 두 가지 희망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하나는 어느 나라든 좋으니 내 책이 번역되어 그 나라 서점에 놓여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 다른 하나는 어느 매체든 좋으니 내 책이 원작이 되어 만들어진 작품을 보는 것이었다. <망원동 브라더스>가 연극으로 무대에 올라 매년 공연을 하게 되면서 두 번째 희망은 이룬 셈이 되었다. 반면 해외에 판권이 팔려 외국 서점에 내 책이 깔린 모습을 보는 건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오늘은 세비야의 작은 서점 좋은 자리에 놓인 정 작가님의 EL BUEN HIJO를 발견한 것으로 대리만족을 해보려 한다.


서점을 나오니 세비야에도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작은 방에 몸을 누이니 마치 감옥 같았다. 그렇게 70유로짜리 하루치 감옥을 대여한 채 세비야의 감옥에서 돈키호테를 구상하는 세르반테스를 상상했다. 시공간을 넘어 그가 꿈꾸던 일들이 내가 꿈꾸던 일들과 같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아 무식하게도 쏘다녔다는 것에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세비야의 감옥에서 출옥한 뒤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로 간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본격적으로 돈키호테를 집필하게 된다. 나 역시 내일 마드리드로 돌아간다. 그리고 무어라도 쓰겠지. 그처럼 나도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숙명. 쓰는 자의 숙명을 믿으며 나는 스스로를 가뒀다. 에어컨이 나오는 감옥은 서늘했고, 꿈꾸기에 좋았다.


메트로폴 파라솔. 세비야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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