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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12.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1

글쓰기 단상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소설가로 등단한 그해의 송년회에서 의사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넌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답했다. “너도 하루 종일 수술대 앞에 서 있진 않을 텐데.” 작가라고 하면 흔히들 그런 상상을 한다. 책상 앞에 앉아 고심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그런 골방형 인간의 모습. 하지만 실제 작가의 생활이 그렇게 책상 앞에 코를 묻고 종일 버티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살아감으로 쓴다. 일상을 충실히 영위하는 것이 글쓰기의 우선 조건이다. 물론 마감 시즌이 되어 집중 마감에 돌입해야 할 땐 하루 열두 시간을 책상에서 씨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일상 속에서 글 작업을 해야 오래 잘할 수 있다. ‘전업’이란 것이 결국 평생 이 일을 해 먹고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업작가로 살아온 지도 20년이다. 중간에 출판사 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때도 계속 만화 스토리를 쓰고 시나리오를 썼으니 쉼 없이 직업적인 글쓰기를 해 온 셈이다. 첫 직장인 영화사 시나리오팀에서 뭣도 모르고 선배들을 따라 시나리오를 썼고(시나리오 도제 시스템의 거의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한다) 만화계에서는 훌륭한 스승님을 알게 돼 그분을 통해 만화 스토리를 배웠으며 출판사에서는 소설 편집자로 일하다 자연스레 소설 쓰는 일을 독학했다. 딱히 재능이 많지 않고 글쓰기밖에 할 게 없어서 이 일을 계속해 온 것이고, 계속 오래 하다 보니 글 쓰는 일이 그나마 제일 잘하는 일이 되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무튼 프로작가 20년 차가 글쓰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살아가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결국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늘 글쓰기를 삶과 분리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작가의 일상은 글 쓰는 것에 온통 집중될 수밖에 없고 그 강박과 집착 속에서 삶이 완성되고 글이 써내려 가지곤 한다. 앞 장에서도 글쓰기의 강박이 없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라고 말했듯, 삶에서 항상 글쓰기의 안테나를 세우고 몸의 감각을 스탠바이 하지 않으면 작업은 곧 무뎌지고 더뎌진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자판에 손을 댈 때마다 그날의 연습을 하는 피아니스트가 된 심정이다. 최고의 피아니스트 건 발레리나 건 매일 연습하지 않으면 실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글쓰기도 똑같다. 며칠 아무것도 쓰지 않다가 다시 쓰려고 하면 영 머리와 손이 따로 논다. 손발이 안 맞는다고 표현하듯 머리에서 생각난 게 손까지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글쓰기란 머릿속 생각이 심장(가슴)을 거쳐 손까지 내려와 종이로 옮겨지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작가는 작가라고는 하는데 작품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입으로만 들려주기 바쁘다. 주변 작가 중 어떤 작품이 나오면 자기도 그런 아이디어와 방향의 작품을 수년 전에 이미 구상했다며 줄거리를 술술 읊기도 한다. 그런 작가는 현업 작가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머릿속 생각이 손은커녕 심장까지 내려오기도 전에 입으로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머릿속 생각을 손까지 온전히 끌고 내려오는 것, 거기에 더해 그냥 내려오는 게 아니라 심장을 관통해 ‘이것이 내 진심을 담은 것인가?’라는 질문의 필터링을 거친 뒤 내려와야 좋은 글이 써지는 것이다.


이것은 메커니즘이고 메커니즘이 완성되려면 반복된 연습밖에 답이 없다. 그 연습은 앞에서 말했듯 피아니스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매일 머리에서 생각과 혼을 끌어 모아 입으로 내뱉지 말고 속에서 되뇌며, 가슴으로 숙성시켜 팔을 지나 손으로 전달하고, 손은 그것을 감당하느라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공정이다.


RESIDENCIA DE ESTUDIANTES 스페인 레지던스의 흔한 산책 풍경1.


책상 위에 앉아 있을 때의 집필 과정이 이러하다면 책상에 앉아 있지 않은 시간은 어떠하냐? 흔히 '발로 쓴 작품' 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취재를 잘 한 글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속된 말로 개발새발 엉망이라는 거다. 그런데 내게 ‘발로 쓴다는 것’은 어슬렁거린다는 거다. 어슬렁거리며 산책도 하고 주위도 살피고 술집에서 친구와 술 한 잔 나누며 주변 이야기도 훔쳐 듣고 하는 거다. 특히 산책이야말로 내겐 작품을 쓰는 데 절대적 요소다. 한때 괜찮은 산책로와 틀어박히기 좋은 작업실만 있으면 뭐든지 쓸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기도 했던 것은, 그만큼 두 가지가 나뿐 아니라 모든 작가들에게 중요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산책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가 터져버렸을 것이다.’ 디킨스의 말이지만 나 역시 그러했다. 작품의 씨가 뿌려지면 그것을 부풀려본다. 처음에는 침대와 책상에서 골똘하거나 끄적이거나 하다 보면 어느 정도 물을 머금은 씨앗이 땅에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햇살과 수분이 꾸준히 공급되어야 그것이 자라듯이, 작품이라는 씨앗을 키우기 위해 나는 걷는다. 대낮에 햇볕 따가운 거리를 걸으며, 비 내리는 도심 거리에 우산을 쓰고, 바람 부는 날 뒷산 산책로를 걸으며, 머릿속 이야기를 곱씹고 또 다듬는다. 발걸음이 지속될 때마다 머릿속에서 이야기도 자기 길을 간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새로운 목표를 발견하고... 마치 내가 이야기를 향해 걸어가듯 이야기 속 주인공도 자신만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그 모든 것이 산책과 어슬렁거림 속 내 발자취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산책이 뇌신경을 자극해 뇌 활동을 활성화시킨다는 임상 결과가 있다고도 한다. 걷다 보면 인생의 많은 고심들이 하나씩 정리되곤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길을 만들어내고 그 길을 찾아 더 먼 길을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 가장 큰 고심 거리는 언제나 작품이고 그 작품을 쓰기 위해 걸어야 하니 산책이야말로 유일한 해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독서다. 스티븐 킹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 독서를 하는 이유를 두 가지 들었는데, 일단 독서를 하면 독서를 안 한 사람은 얻지 못하는 작가 입문 증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독서가 글쓰기의 기본이라고 했다. 또 한 가지는 독서를 하다 보면 이런 자도 작가라고 이 따위 글을 써서 책을 내는데 나라고 못할 소냐 하는 자신감이 생겨 글쓰기에 도움된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이야기를 읽어야 이야기를 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는 없기에 잘 써진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감탄도 하고 탄식도 하고 비웃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나도 한번 써볼까 하는 의욕과 오기도 생긴다.


사람들 사는 이야기 따위 다 비슷하다. 다만 내가 잘할 수 있는 화법으로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 이야기는 발명이 아니다. 이야기는 발견이고 공정이고 포장이다. 세상을 살며 발견한 글감을 발견해 자신만의 공정을 거쳐 읽기 좋게 포장해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산책과 공상을 하며 어슬렁거리며 세상을 만나기도 하지만 내가 일일이 만나지 못하는 많은 세상이 책 속에 또 있다. 이야기라는 세상은 그렇게 책 속에도 있고 브라운관에도 있고 인터넷 창 게시판에도 있으며 스크린 속에서도 빛난다. 나는 부지런히 안테나를 세우고 온갖 이야기 세상 속 나만의 이야기를 발견하려 애쓸 따름이다.


RESIDENCIA DE ESTUDIANTES 스페인 레지던스, 나의 326호.


그리하여 여기 마드리드에서의 내 일상도 이러하다. 일어나 러닝을 하고 돌아와 쉬다가 간단히 커피나 주스에 과일로 아침을 때우고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나면 이곳보다 7시간 앞서 일어난 한국의 뉴스라는 이야기를 접한다. 지인들의 소식도 접한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쓰기 위해 한글파일을 띄운다. 전업 20년 차라지만 여전히 바로 쓰던 작품 속으로 들어가지지 않는다. 언제나 첫 문장을 쓰기 위한 버퍼링이 있다. 뜸 들이기, 주저하기, 머뭇거리기가 펼쳐진다. 다시 인터넷을 켜고 딴짓도 하고 음악도 듣고 하며 빈둥거린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책상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레지던스를 한 바퀴 어슬렁거려본다. 오늘 뭘 써야 하지, 어디까지 쓰면 돼지? 어제 그 부분은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자연스레 작품에 대한 디자인을 머릿속에 굴리며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어제 쓴 부분을 읽는다. 그리고 조금 용기를 얻어 비로소 글쓰기를 시작한다. 한 장 정도 쓰고는 숨을 고른다. 오늘 중 첫 번째 몰입이 끝났다. 지치고 심심하다. 생각도 더 나지 않는다. 일어나 짐을 챙겨 다시 방을 나간다. 레지던스를 나가 지하철을 타고 레티로 공원으로 향한다. 마드리드의 허파 레티로 공원에 도착해 내 허파가 신선한 바람을 잔뜩 품게 해 준다. 세 마리 각각 다른 견종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스페인 할아버지를 스쳐간다. 돌아서 개들을 바라본다. 개들을 보면 언제나 행복하다. 벤치에 앉다가 공원 잔디밭에서 비키니만 입고 선탠을 하는 세뇨리타를 발견하고 놀란다. 민망함에 다시 일어나 호수 쪽으로 간다. 레티로 공원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뱃놀이 중인 관광객들을 바라본다. 저기는 프랑스 커플, 저기는 일본 커플, 저기는 음... 북유럽 국가 중 어딘가의 사람들... 그렇게 어슬렁거리다 보면 몸도 풀리고 마음에 여유도 생긴다. 오전 작업에 있었던 부담이 좀 누그러지고 생각도 다시 여물어가는 게 느껴진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와 다시 책상에 가 한 장 정도를 쓴다. 마저 쓰려고 했으나 피곤함이 몰려온다. 그래 이곳은 마드리드. 나는 현지인과의 동화를 위해 시에스타를 청한다. 한두 시간 정도 잠에 빠져든 뒤 일어나 하품을 하고 물을 마시고 몸을 다시 활성화시킨다. 책상에 앉아 마저 한 장을 써보려 하나 잘 되지 않는다. 일어나 방을 나간다. 동네 까르푸 익스프레스에 가서 저녁에 먹을 식량과 와인을 확보한다. 방에 와 식량을 쟁여두니 의욕이 난다. 마저 다 써야 저걸 먹을 수 있다. 먹이가 네 등 뒤에 기다리고 있고, 까바 브릐가 냉장고에서 시원해지고 있다. 어서. 어서. 마지막 한 장은 그렇게 음식을 걸고 꾸역꾸역 써 나간다. 결국 오늘 쓰기로 한 세 장(A4 기준)을 마쳤다.


식량과 와인을 먹으며 하루 일과를 정리한다. 노트북으로 음악도 듣고 스페인 TV에서 해주는 프리메라리가도 시청하며 오늘 쓴 글에 대해서는 잊으려는 시늉을 한다. 쉽지는 않다. 작가의 강박은 생활에 닿아있어 늘 다음 스텝을 고민하게 만든다. 하루 세 장. 하루 세 장만 써도 성공한 셈이다. 그렇게 한 달이면 90장짜리 이야기가 완성된다. 90장짜리 이야기란?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이다. 물론 그 90장짜리 이야기는 180장이 될 수도 있고, 같은 분량으로 열 번 고쳐질 수도 있다. 그러기에 시간이 걸리고 숙성이 필요하다. 적어도, 나는 하루 세 장을 피아노 연습하듯 쓸 따름이다. 나는 그런 걸 마감이라고 부른다.


오늘의 습작 중 내 완성된 소설에 한 장이 들어갈지 한 문장이 들어갈지 아무것도 써먹지 못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나는 다만 글 쓰는 인간의 일상을 가동했을 따름이다. 솔직히 완성도는 형편없을 것이다. 좀 잘 쓴 것 같은 날은 술이 달 것이고, 좀 엉망인 날은 쓴 맛에 먹는 술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고칠 수 있는 원고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런 이를 작가라고 부른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투명인간 작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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