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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10.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0

다시, 마드리드


마드리드의 일상에 안착하자 쓰지 않고도 집필은 시작되고 마는데...



돌아온 마드리드는 변하지 않는 풍경화처럼 내 앞에 있었고 나는 살며시 안착했다. 남부 지방에서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올라와 이곳은 좀 가을 느낌이려니 했으나 웬걸, 여전히 짱짱한 햇살로 가득한 마드리드였다. 아침저녁 일교차가 좀 나긴 했지만 대낮의 열기는 여전히 이 도시를 핫하게 만들고 있었고 거리 곳곳에 붙은 노랗고 붉은 스페인 국기는 열정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레지던스 숙소는 깨끗이 청소되어 이 넓은 도시 속 나만의 공간 하나가 준비되어 있음에 안도감을 주었고, 도시의 모든 것이 나 없이 조용히 돌아가고 있어 이방인의 마음을 더욱 느긋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방인. 이 도시의 이방인이자 레지던스의 게스트로서 오직 숙소만이 내 존재를 기억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행 중 밀린 빨래를 하러 가다 복도에서 식당 지배인 호세를 마주쳤고 그는 웃음 가득 반가운 얼굴로 너 그동안 어디 갔었냐고 물어왔다. 여행을 갔다. 세비야, 말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며 이따 저녁 먹으러 오라고 말했다. 역시 밥 주는 사람은 밥 먹는 사람을 기억하는구나. 그의 환대에 빨래를 돌리며 혼자 미소를 짓는다.


처음에 스페인어 메뉴판을 보고 주문도 잘 못해 토끼고기를 어거지로 먹었고 호세는 그런 날 안쓰러운 듯 바라보았지. 어느 날 미리 올라온 메뉴 공지를 공부해 가 주문하자 그는 마치 시험에 통과한 학생을 보듯 뿌듯해했지. 그런 소통의 단계를 거치자 그는 내 존재를 기억하고, 부재를 신경 쓰고, 재회에 반가워한다. 관계란 역시 진득하게 몇 번 주고받음이 오가야 한다는 것, 서로의 말과 행동을 조금씩 씹어봐야 진심을 맛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느끼며 빨래방에서 호세의 반가운 미소를 따라 해 보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호세의 환대를 맞으며 나의 레지던스 레스토랑 최애 메뉴, 바칼라우(염장 대구) 찜을 먹었다. 고향의 맛이었다.

올리브유에 잠긴 바칼라우 찜, 방울토마토와 구운 마늘을 뿌리면 됩니다. 참 쉽죠!



그렇게 마드리드에서의 일상이 재개되었다. 안달루시아 여행은 재충전으로도, 돈키호테를 곱씹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마지막 세비야에서의 홀린 듯한 하루는 내게 글 쓰는 자의 숙명과 고통을 느끼게 해 주었고, 마드리드에 돌아오면 그 땔감을 바탕으로 다시 집필의 온도를 높이리라 마음먹었다. 어느덧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이다. 해가 뜨는 8시쯤 일어나 동네를 러닝하고 샤워 후 토마토를 바른 빵에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치즈를 얹어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한국문화원에서 빌려온 에코의 책을 읽고는 노트북을 켜고 밀린 메일과 여러 정보를 확인한다. 이곳은 오전이지만 한국은 7시간 빠르므로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다. 마드리드의 오전이면 그날 한국의 하루가 어땠는지를 검색할 수 있다. 앞서 흘러간 한국의 일상을 살피며 한국에서 보내온 메일을 확인하며 이곳에서의 7시간 늦은 일과를 시작한다. 답 메일을 보내고 한심한 뉴스에 댓글도 달고 SNS에 올라온 지인들의 근황에 미소도 머금다 보면 점심이 된다.


레지던스 식당의 점심과 저녁은 거창하다. 아침이야 호텔 뷔페 스타일 조식으로 간단하게 깔리지만 점심 저녁은 PRIMERO, SEGUNDO, POSTRE로 1식, 2식, 후식이 모두 제공된다. 각 식사 당 메뉴도 두 개 중 고를 수 있고 음료도 한 잔 무료다. 한국에서 1일 1식 혹은 1일 1.5식을 한지 꽤 된 나로서는 부담스러운 식사이고, 사실 서빙을 받으며 메뉴를 그때그때 고르는 서양식 정찬을 하루에 두 번 받는 것도 여전히 뭐랄까 과분하다. 대접받는 걸 만끽하기에는 소박한 나의 식사패턴과 위장 상태이기에, 며칠 전부터 하루에 한 번만 정찬을 먹기로 했다. 그래서 점심을 그렇게 먹고 저녁은 숙소에서 간단히 맥주나 와인에 하몽, 올리브를 안주로 먹은 뒤 잠을 청한다. 이 패턴이 완성되기까지 한 달이 걸린 듯하다.


레지던스 식당 위층의 공용 테라스.



아무튼 점심 정찬을 먹는다. 상당히 배가 부르다. 와인 한 잔도 곁들이니 오후 해가 더 따뜻하다. 레지던스 정원을 산책하고 숙소로 돌아와 이제 본격적인 집필을 해보려 한다. 해보려 한다. 졸린다. 점심 정찬은 역시 거하다. 잠시 눈을 붙이고 숙소를 나온다. 걷는다. 마라뇽 광장을 지나 다음 지하철역까지 산책을 하며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써본다. 내 글쓰기의 8할은 산책이다. 계속되는 발걸음을 화력 에너지 삼아 빵을 구워나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보행신호가 바뀌자마자 갑자기 젊은 여자 둘이 건널목으로 뛰쳐나간다. 나는 서서 멍하니 본다. 두 여자는 잽싸게 양손에 쥔 곤봉을 저글링 하며 신호 대기 중인 차들을 상대로 즉석 공연을 펼친다. 스페인의 손연재인가, 곡예단 출신 집시들인가, 가늠이 잘 안됨에도 곤봉을 머리로, 다리 사이로 잘도 넘기는 모습에 감탄이 나온다.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서로 곤봉을 주고받는 사이 보행신호가 곧 끝날 기세다. 곤봉이 떨어질까 마음 조리는 게 아니라 신호가 바뀌어 저들이 차에 치일까 더 긴장된다. 그럼에도 가뿐하게 서로의 곤봉을 던져 돌려주고는, 신호가 바뀌자 둘은 차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두 여인은 출발하려는 차들 사이를 조심스레 역으로 거슬러 가며 동전 지갑을 흔든다. 나는 차도로 뛰어들어 그들에게 관람료를 지불하고 싶지만 건너편 차도인지라 미처 그러지 못한다. 두 광대는 동전을 많이 얻지 못한 채 차량의 흐름 속에서 위태롭게 반대편 인도로 사라진다. 이곳은 관광지도 아니고 평범한 동네 6차선 도로일 뿐이다. 이곳에서 내 눈앞에 잠시 펼쳐진 스펙타클에 여전히 어안이 벙벙하다. 께 부에노! 길 건너 골목으로 사라져 간 멋진 광대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이것도 기억해야 할 마드리드의 일상임을 잊지 않는다. 동전 대신 내 기억을 얻은 그녀들에게 행운이 더하길!


'건널목 공연'의 잔상을 즐기며 다시 거리를 걷는다. 가만 어디까지 작품 생각을 했더라? 기억은 그녀들의 곤봉과 함께 빙글빙글 돌며 흩뿌려진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아 거리를 계속 걷는다. 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게 느껴지니 돌아갈 타임이다. 왔던 길을 돌아간다. 여행 중일 땐 늘 새 길을 찾아 걷는다. 하나라도 더 새로운 걸 보려고 같은 길을 웬만하면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 구상 산책을 할 땐 익숙한 길이 좋다. 길을 살피고 찾는 행위를 지우고 익숙한 길을 무의식으로 걸으며 그 빈 공간을 상상으로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산책 때마다 눈을 즐겁게 해 주던 파키스탄 대사관 차량, 벤츠에 칼라 문신이라니!



구상을 다시 붙잡아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벌써 숙소 부근이다. 단골 까르푸 익스프레스에 들른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먼저일까 까르푸 익스프레스가 먼저일까 다시 한번 궁금해하며 와인 코너로 향한다. 내가 매일 밤 와인을 마시는 건 술꾼이어서가 아니다. 이것은 경제논리다. 한국에서 만 원 넘는 포도주가 이곳에선 3유로면 충분하다. 오천 원도 안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특히 좋아하는 까바 브릐(스페인 스파클링 와인)는 한참 더 싸다. 한국에서는 프레시넷 까바 브릐가 2만 원 선이지만 이곳에서는 6유로 선이다. 반값이 한참 안 된다. 그러므로 매일 까바 브릐 한 병을 먹으면 만원 넘게 차익을 남기는 셈이다.


이 셈법이 이해가 안 되면 다음으로 넘어가자. 이곳에 와서 원체 좋아하던 하몽을 어쩔 수 없이 많이 먹게 됐다. 김치버거 만들 듯 하몽 버거 하몽 샌드 하몽 과자 등 어디나 널린 게 하몽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 하몽은 비싸다. 가난한 작가인 나는 한국에선 이베리코 베요타가 비싸 세라노 급으로 먹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무조건 이베리코 베요타로 그것 중에서도 좋은 급을 찾아 먹는다. 그래도 한국보다 싸다. 메르까도(시장)에 가서 즉석에서 하몽을 끊어 오면 더 싸고 맛있다(아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시범을 보여줬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비싼 돈을 주고도 대패 몇 조각 깎아 놓은 듯한 하몽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어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푸짐하고 맛있고 저렴한 가격의 하몽을 쌈 싸 먹듯 우걱우걱 씹어 먹을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 논리를 떠나서 정신적 풍요로움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는 스페인에서 되도록 넉넉하게 하몽을 먹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에 돌아가면 대패 조각처럼 나오는 하몽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안주 빨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술친구들에게 하몽을 한 조각이라도 더 양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풍요로움에 서로의 우정 다짐은 더욱 빛을 발하며 충만한 술자리의 완성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레지던스 부근 파즈 시장 정육점. 하몽, 하몽, 하몽.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다시 노트북을 켠다. 오늘은 우연이 선물한 환상적인 공연을 보았다. 관광지도 아닌 동네 거리에서, 집시인지 천사인지 모를 두 여인이 펼친 찰나의 저글링,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다. 여전히 접하지 못한 마드리드 관광 명소는 있지만, 일상의 지점에서 바라보는 동네는 내게 여전히 유효한 관광지다. 안달루시아 여행을 정리하며 작품에 대한 구상도 머릿속에서 뭉근하게 달여 보았다. 하지만 아직 정리할 정도는 아닌지 자판에 손을 대고는 멍하니 있기만 한다. 냉장고에 넣어둔 까바 와인이 충분히 시원해졌는지가 궁금해지고 하몽은 (그 짠 게 절대 그럴 리 없지만) 혹시 너무 방치해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나는 책상을 떠난다. 냉장고를 연다. 까바는 너무 시원해도 안 된다. 적당하니 좋군. 하몽도 더 놔둬봐야 좋을 것 없다. 한 입 맛보니 짭쪼롬하고 코롬코롬하고 딱이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경제 논리와 정서적 충만함의 미래를 위해 까바 와인을 마시고 하몽을 씹으며 일찍 하루를 마무리한다.


혼술을 하려니 어쩔 수 없이 곤궁해 노트북으로 한국의 뉴스를 접한다. 정말이지 한국의 뉴스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 법무부 장관 임명 건을 두고 난리도 아니고 그 와중에 경기 남부 연쇄살인범의 정체가 밝혀졌다. 백종원은 여전히 골목의 식당들을 순시 중이고 송가인은 무슨 노래를 불러도 맛깔나기 그지없다. 그 와중에 나의 팀 두산 베어스가 정규 시즌 우승을 해버렸다. 팬이지만 올 시즌은 내심 포기한지라 홀가분하게 마드리드에 왔는데, 뜬금포 우승이라니, 그것도 마지막 날 극적 우승 확정이라니! 감탄과 푸념이 동시에 올라온다. 올해도 가을야구를 해버리면 마드리드에서 가을을 보내는 나는 어쩌란 말이냐, 나는 행복한 투정을 부리며 두산 베어스의 우승에 독작으로 축배를 올린다.


마드리드에 칩거한 고독한 한국 작가의 일상이 이렇게 마무리된다. 오늘도 한 줄 못 썼다. 그러나 쓰려고 애쓰며 하루 몫의 삶을 충실히 살아냈다. 침대에 누우며 내일은 한 줄이라도 써야 한다는 적당한 강박을 느낀다. 정상이다. 글쓰기의 강박이 없는 작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일 아침엔 집필 강박과 숙취가 잘 버무려진 채로 하루가 또 시작되겠지. 다행히 내일의 태양은 떠오른다. 세계 어느 곳보다 강렬하게. 이곳은 태양의 나라 스페인이고, 태양의 광장이 자리한 마드리드니까.


백화점 식품관의 나름 비싼 까바. 까바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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