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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16.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3

알깔라 데 에나레스 下


세르반테스 축제에서 볼 수 있는 돈키호테의 돈키호테에 의한 돈키호테를 위한 것들.



10월 9일 정오. 나는 알깔라 데 에나레스 중앙 광장 옆에 위치한 오래된 극장 앞에 서 있다. 나 말고도 여러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잠시 뒤 극장 문이 열리면 우리는 입장한다. 맨 앞 의자에 당당히 앉으려고 보니 첫 두 줄은 의자에 이름이 붙어있다. 관계자 좌석이구나. 그래서 세 번째 줄에 앉는다. 극장은 서양 고전극이라도 공연할 수 있을 듯 고풍스러움이 넘치고 2층으로 된 공간까지 어느새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무대 뒤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LEXTURA PUBLICA DE EL QUIJOTE' 바로 ‘돈키호테 낭독 공연’이다. 어제 관광센터로부터 낭독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온몸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솔직히 이 공연의 자세한 방식과 전통은 모른다. 심지어 러닝 타임도. 하지만 나는 그저 ‘돈키호테 낭독 공연’이라는 정보만을 가지고 지금 이곳에 와 경건하게 앉아 있다. 극장 안 현지인들이 나를 곁눈질하는 게 느껴진다. 저 동양인 사내는 낭독 공연에 무엇을 얻어먹으러 온 것일까? 스페인어는 알아들을 수 있는 걸까?라는 질문의 눈빛이 느껴진다. 나는 앞자리에 떡하니 앉아 소 눈물 떨어지는 듯한 눈빛을 무대로 던짐으로써 이 공연에 대한 강한 열의를 보일 따름이다.


잠시 뒤 앞 두 줄을 ‘관계자’ 들이 들어와 채운다. 가지각색이다. 양복을 입은 훤칠한 중년 사내는 시의원처럼 보이고 청바지에 남방을 입은 머리가 벗겨진 할아버지는 은퇴한 선생님 같다. 화려한 정장 원피스에 머리도 하고 온 아주머니는 양품점 주인 느낌이고, 목덜미로 문신이 보이는 개성적인 복장의 젊은 여성도 보인다. 점퍼 차림에 키가 작고 다리를 저는 분은 구둣방 노인 같아 보이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식당 종업원 느낌의 총각도 보인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분들은 올해 알깔라 데 에나레스를 대표해 이 낭독 공연에 참여하게 된 이 도시의 시민들이로구나. 신청을 받아 제비뽑기를 했는지, 시의회에서 심사를 거쳐 선발을 했는지, 돈키호테 필사를 많이 한 사람을 뽑는지... 어떤 경로로 뽑는지는 당췌 모르겠지만 이 도시의 구성원들이 기꺼이 참여해 이뤄지는 공연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더욱 고무되면서 이들의 공연이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와 궁금증이 차올랐다.


낭독 위원장 혹은 극장 대표로 보이는 수염이 덥수룩한 어르신이 무대로 올라와 마이크를 켠 후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을 한다. 뒤이어 이번 낭독 공연에 참가하는 중년 사내가 올라와 자신의 낭독 분량이 적힌 종이를 펼친 채 낭독을 하기 시작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분명 프로페셔널한 낭독자가 아님에도 그는 최대한 감정을 담아 돈키호테의 한 부분을 낭독했다. 뒤이어 나온 엉거주춤 겨우 무대에 선 할머니 역시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돈키호테의 한 구절을 낭독했다. 뒤이어 다음 사람, 또 다음 사람, 그다음 사람, 자신이 맡은 분량의 돈키호테 이야기를 정성을 다해 목소리와 표정, 눈빛으로 재현해 나갔다. 거기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지역 명칭과 돈키호테와 산초의 이름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전부’였다. 돈키호테를,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를,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를 기리는 고향 사람들의 진심까지도 모조리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나게 진지하고 굉장히 감동적이었던 2019 세르반테스 축제의 돈키호테 낭독 공연



낭독이 끝나기까지는 한 시간 십여 분이 흘렀다. 총 20명이 넘는 이 도시의 시민들이 마치 제의에 참여하듯 낭독을 했고 관객이 된 시민들과 관광객들 또한 이 공연의 일부가 되어 숨죽이고 경청하며 극의 진행에 참여했다. 낭독이 끝나고 시민 한 명 한 명이 내려갈 때마다 짧지만 강렬한 박수 세례가 펼쳐졌고 모두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의 일부가 되어 귀를 기울여 진심 어린 낭독을 느끼고 반응했다.


낭독 공연이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뜨고 난 뒤에도 나는 극장에 남아 텅 빈 무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곳에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환영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시민들이 함께 연출한 돈키호테 공연은 참으로 경이롭고 숭고하기까지 했다. 나는 온전히 그것을 받아 안은 채 잔뜩 고양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섰다.


극장 앞 광장 중앙에는 세르반테스 동상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아래로 이제는 완연한 축제의 장이 펼쳐져 있었다. 광장의 반을 차지한 좌판에서는 먹거리와 음료, 각종 술이 넘쳐났고 사람들은 서서 또는 앉아서 경쟁하듯 먹고 마시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또한 광장의 나머지 반쪽에는 작은 놀이동산이 급조되어 있었는데 소형 관람차, 간이 회전목마, 간이 바이킹, 간이 트램폴린 등에 아이들이 가득 올라탄 채 즐거워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놀이기구들이 인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이킹 담당자인 덩치 큰 사내는 자신의 온몸을 바이킹 뱃머리에 실어 한번에 바이킹을 밀고는 이후 손으로 컨트롤하며 아이들과 밀당을 했고, 소형 관람차 역시 산적같이 생긴 사내가 자신의 팔 힘으로 기어를 돌려 관람차를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캐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선원 풍 옷을 입은 채 이 일을 하고 있어서 마치 중세 배경 친환경 에코 놀이동산에 온 꼴이었다. 우리로 치면 민속촌에 놀이공원이 들어선 형국이랄까. 당연히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즐겼지만 그들의 놀이기구를 운전하는 선원 아저씨들의 장난과 익살에 더 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꽤나 멋진 광경이었다. 부모들 역시 이 놀이동산을 마냥 즐겁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한 번 더 타겠다는 아이들에게 1유로씩을 쥐어주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니 세르반테스 동상 역시 놀이동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듯했다.


축체에 맞춰 들어선 친환경 에코 놀이동산. 세르반테스 광장.



허기를 채울까 해 메인 거리로 접어들자 이곳은 말 그대로 세르반테스 시절의 시장으로 완전히 변해있었다. 좌판의 상인들 또한 그 시대 복장과 분장을 한 채 팔라펠과 생감자 튀김과 고기 꼬치와 바비큐와 생맥주를 팔고 있었다. 먹을 것뿐 아니고 각종 액세서리, 기념품, 향신료, 나무 공예품, 가죽 제품, 향초, 그림 등을 파는 상점 역시 자신들의 상품에 걸맞는 분장을 한 채 부지런히 호객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세르반테스가 살던 때로 돌아간 듯 도시 전체가 '과거 코스프레'로 방문객들에게 그때의 한 시절을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낯선 세상에 떨어져 정신이 나간 얼간이 마냥 좌판 곳곳을 살피고 사진을 찍고 구경을 하느라 배가 고픈 줄도 잊었다.


그때였다. 피리와 아코디언 소리가 신나게 울려 퍼지며 거리 한쪽이 마치 홍해 갈라지듯 열렸다. 퍼레이드가 시작된 것이었다. 어제 관광센터에서 들은 두 가지 흥분되는 행사 중 하나가 낭독공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대략 점심 즈음에 한번 저녁 즈음에 한번 진행된다는 퍼레이드. 점심에는 낭독공연을 보느라 놓친 줄 알았던 그것이 운 좋게 지금 펼쳐지는 중이었다. 세르반테스 시절의 악단처럼 갖춰 입은 대여섯 명의 악사들이 피리와 아코디언, 퍼커션, 작은 기타 등을 연주하며 퍼레이드의 길을 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흰 말을 탄, 은빛 갑옷을 두른 껑정한 노인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구부러진 대야 모양의 투구를 쓰고 제법 긴 창을 든 채 허리를 펴 말에서 꼿꼿하게 자세를 잡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고 고함을 질러댔다. 돈키호테!! 돈키호테!!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세르반테스 탄신일 축제. 알칼라 데 에나레스. 2019.



그리고 돈키호테가 탄 백마의 반 보 뒤로 작고 배 나오고 투실하고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노새를 끌고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영락없는 산초 판사였다. 백마 위의 조금은 피곤한 듯한 돈키호테와 활발하게 사람들과 대화와 음식을 주고받으며 걸어오는 산초 판사. 두 사람이 내 앞을 지나칠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채 마치 영화의 필름이 흘러가는 것을 목격하듯 그저 눈으로 그들의 재현을 목격할 뿐이었다.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앞으로 질러나가며 스마트폰 카메라를 켰다. 이 목격담을 증명하려면 사진뿐이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 그들의 모습을 담아 영감의 도구로 계속 보고 또 봐야 할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돈키호테와 산초 주위로 다가가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나 나 말고도 슈퍼스타급인 그들의 등장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사람들 투성이었기에 대혼란 속에서 겨우 몇 컷을 건져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마다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 산타클로스 역할을 할 사람을 뽑는다. 일단 듬직한 덩치여야 하고 나이가 있으면 더 좋고 무엇보다 뭉게뭉게 흰 수염이 잘 어울려야 한다. 이 도시 역시 매년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역을 해 줄 주민을 공개 모집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캐스팅이 열일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삐쩍 마르고 고집 세 보이는 인상의 노인네와 퉁퉁한 체구에 넉살 좋게 생긴 하인의 모습... 너무나도 그럴듯해 나는 캐스팅 디렉터에게 헌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여자 돈키호테와 거인 산초, 소년 돈키호테와 아줌마 산초도 보고 싶어 졌다. 혹은 이 축제가 계속되는 동안 분명 그러한 코스프레 자리도 마련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동네는 이렇게 멋지게 그들만의 영웅을 재현시켜 시끌벅적하게 자신들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었다.


축제의 행진. 2019. 10. 8. 알깔라 데 에나레스. 



뒤이어 커다란 원형 휠 안에 몸을 넣은 채 그대로 굴러가는 사내와 춤추는 댄서 언니들이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따랐고, 다시 반지의 제왕에나 나올 듯한 걸어 다니는 거대 나무 몇 개가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지나갔다. 그 뒤로 중세 시대 서민 복장을 한 이 도시의 시민들 수십 명이 행렬의 뒤를 받친 채 노래를 부르며 행진해왔다. 실로 재미있고 웅장하고 신기하고 흥겨운, 무엇보다 내게는 영감이 넘치는 퍼레이드였다. 이들 중 연기자나 고용된 재주꾼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시민들이 직접 복장을 갖춰 입고 이 행사의 주인이자 퍼포먼서로 참여하고 있었다. 알깔라 데 에나레스의 주민들은 진심으로 돈키호테를 살아있는 자신들의 영웅이자 조상으로 믿고 따르는 듯했고 그것이야말로 돈키호테를 쫓아 여기까지 온 내게 참을 수 없는 공감과 희열을 전해주고 있었다. 알깔라 데 에나레스, 돈키호테를 믿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르반테스의 고향. 오늘이 바로 세르반테스의 탄신일이고 이 도시의 축제다. 그리고 극동 아시아의 중년 소설가가 마침내 돈키호테를 마주하게 된 날이다.


세르반테스 탄신일 축제. 알칼라 데 에나레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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