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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18.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24

마드리드 한국 영화제


글은 안 쓰고 생각만 부유하던 날들 중 영화제라니.



알깔라 데 에나레스를 다녀왔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그리고 그들 후손들의 엄청난 열정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에는 글이 술술 써질 줄 알았다. 시내 광장에서 만났던 세르반테스 옹도 그리 예언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반대였다. 마치 목표한 바를 이룬 뒤 허탈해지듯 오직 그의 생일에 그의 도시에서 한바탕 카니발에 빠지고 나니 이미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렸다. 이번에 충전한 영감을 바탕으로 돈키호테를 한국에 소환하려던 내 흑마술은 전혀 발휘되지 않았다.


그렇게 10월 한 달이 지나갔다. 마드리드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뜨거운 햇살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고 일교차가 커지기 시작했다. 레지던스 생활에도 완전히 정착해 마라뇽 광장이 신촌로터리, 말라사냐가 연남동, 동네 메르까도나는 망원시장, 까르푸 익스프레스는 모퉁이 편의점같이 느껴졌다. 익숙해질수록 더뎌지는 것도 있기 마련인지라 좀처럼 발동이 걸리지 않는 집필 모드를 내려놓은 채 마덕리(마드리드의 한자 이름)의 가을을 자꾸 서성이게 되었다. 물론 그냥 보낸 건 아니다. 돈키호테를 다시 읽었다. 마드리드에서, 라만차의 주도에서 읽는 돈키호테는 확실히 느낌의 질감이 달랐다. 지난 8월 원주 토지문학관의 녹음 속에서 상상하며 읽어 내려간 그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이 언제든 펼쳐져 있는 라만차의 햇살 아래 읽으며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먹었을 법한 딱딱한 빵과 절임 고기로 끼니를 때우니, 책의 내용이 갈증에 지친 몸속으로 이온음료 스며들 듯 빨려 들어갔다.


높아진 마드리드의 가을 하늘, 구름이 다했다.



돈키호테를 읽다 마드리드 시내에 나가면 흡사 지금 이곳에 늙은 기사가 말을 타고 등장하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말을 탄 돈키호테, 그는 현재 관광지를 도는 마차를 모는 마부다. 그의 말 로시난테는 늙고 지쳐 마차에 탄 덩치 큰 북유럽 어른들을 버거워하며 콧김을 분수처럼 뿜어대고 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혹독하게 로시난테를 부려 마드리드 관광지를 돈다. 돈키호테에게 돈은 자신을 무력화시키는 거인들의 마법이지만 돈이 있어야 전투를 준비할 수 있다. 그는 오늘도 거인과도 같은 대형 빌딩이 즐비한 그랑 비아 거리를 지나며 이를 악문다. 지금은 거인들과 싸울 때가 아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집에 돌아온 돈키호테는 보데가에 간다. 보데가 주인 산초 판사는 이 늙고 지친 영감이 오늘은 꼬장을 부리지 않길 바라며 눈인사를 한다. 돈키호테는 술이 약해져 겨우 띤또 데 베라노를 한잔 시키고 타파스로 나온 올리브를 주섬주섬 씹는다. 고향의 달콤한 아몬드가 박힌 뚜론이 먹고 싶어 지는 돈키호테. 산초에게 뚜론을 내오라고 하지만 무시당한다. 산초는 여기는 술집이고 달콤한 걸 찾으려면 앙글레 백화점 지하에나 가라고 핀잔을 준다. 이에 돈키호테는 동문서답하듯 산초 판사에게 대체 언제 가게를 접고 전투에 동참할 거냐고 닦달한다. 산초는 가게 빚을 갚을 돈을 내면 고려해 보겠다고 답하고, 돈키호테는 남은 잔을 비우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선다.


보데가를 나가는 돈키호테를 다른 손님들이 안쓰럽게 바라본다. 산초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둘세(Dolce. 단 음식)에 너무 빠져서 문제예요. 당뇨가 온 거 같아. 돈키호테는 골목길을 걸어 광장에 다다른다. 광장 너머에 보이는 앙글레스 백화점. 그곳에 둘세가 있다... 둘세를 먹으면 둘시네아 생각이 날 것이다. 돌시네아를 떠올리면 돈키호테는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잉글레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누추한 임대 숙소로 향한다. 이 무참함을 견디고 기사도 정신을 되살리는 전투를 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21세기가 열렸음에도 회복되지 않는 기사도 정신을 위해 그는 오늘도 둘세 대신 웅담을 입에 물어야 한다.


책을 읽고 마드리드 거리를 오후부터 헤매다 저녁 술집에 들어서면 대략 이런 상상이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흐른다. 나는 마오우 생맥주에 올리브유를 뿌린 살치촌을 뜯으며 머릿속의 돈키호테가 서울의 거리에 등장하는 모습 역시 상상해본다. 어떻게든 돈키호테를 서울로 소환하는 게 내 목표가 아닌가? 하지만 마드리드 거리를 추적추적 걸어가는 돈키호테의 뒷모습은 보이는데 그가 서울에만 가면 황학동 골목에서 골동품 요강을 투구로 착각해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떠오를 따름이다.


그때 카톡이 울렸다. 아내인가? 아내가 이 시간에 연락이 올 리가? 이 시간에 내게 문자를 줄 사람은 편의점에서 밤샘 알바를 하는 퇴직자 친구뿐이다. 그가 한국의 새벽에 톡으로 던지는 인생의 푸념은 쓰고 진하다. 고향의 새벽에서 날아온 그의 안부는 내겐 저녁의 쓴 커피와도 같다. 그렇게 나는 마드리드의 저녁에 그와 공감하곤 했는데,  예상과 달리 카톡은 친구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마드리드의 한국문화원 실무관으로부터 온 그 카톡은 어떤 링크였다. 링크를 들어가 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스페인에 우리 영화를 꾸준히 소개해온 '스페인 한국영화제'가 5일부터 10일(현지시간)까지 마드리드에 있는 극장과 주스페인 한국문화원에서 열립니다. 올해로 12회를 맞은 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특별 세션이 마련됩니다.


칸과 베를린·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밀양'(감독 이창동), '밤의 해변에서 혼자'(감독 홍상수), '씨받이'(감독 임권택)가 상영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스릴러', '천만 관객', '남북관계'라는 키워드 3가지로 선정된 우리 영화 9편이 스페인 관객들을 만납니다.


'스페인 한국영화제' 개막작으로는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죄와 벌'이 선정됐고,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포함해 '마녀 1'(감독 박훈정)· '공작'(감독 윤종빈)·'스윙키즈'(감독 강형철) 등이 상영됩니다. 스페인에선 지난달 25일 개봉한 영화 '기생충'이 호평을 받으면서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오호라. 스페인 한국영화제라! 이곳에 온 지 두 달 동안 한국영화는커녕 극장 문턱에도 못 간 내게 영화제 정보는 흥미롭기 그지없어 이것이 한국영화제가 아니라 파푸아 뉴기니 영화제라도 초대만 하면 참석할 기세였다. 뒤이어 온 카톡에는 영화제 개막일에 개막작을 보러 와주셨으면 한다는 초대였다. 와우. 이렇게 감사할 데가... 하지만 이미 본 작품이 개막작이면 딱히 또 볼 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개막작을 살펴보니... 김용화 감독님의 <신과 함께> 1편이었다. 음. 이렇게 다시 감독님을 만나는군. 그렇다. 나는 과거 한때 김용화 감독님의 작가팀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신과 함께>는 이미 본 작품이지만 감독님과의 인연도 있고 하정우, 김향기, 주지훈 모두 좋아하는 배우이기에 다시 보기로 했다. 나는 흔쾌히 참석에 응하겠다 답했다. 타국에서 슬럼프에 빠져 혼술 중인 한국 작가를 용케 챙겨준 실무관의 센스에 감사하며.


날이 훌쩍 추워진 11월 5일 나는 마라뇽 광장에서 147번 버스를 탔다. 외국 도시에서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타게 되면 현지인에 한발 다가가는 건데 이제 지하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타지 않을 정도로 버스가 편하게 된 나다. 147번은 내가 좋아하는 마드리드 거리를 차례로 거쳐 종점인 까야오에 나를 내려줬다. 스페인 한국영화제 개막식이 열리는 팔라시오 데 라 프렌사 극장(Palacio de la Prensa)은 까야오 광장 바로 맞은편에 있는 오래된 극장이다. 까야오 광장을 중심으로 극장들이 늘어선 이곳은 언론에서는 ‘마드리드의 타임스퀘어’라고 하지만 나는 (구) 명보극장, (구) 스카라 극장, (구) 국도극장에 둘러싸인 충무로 어디쯤으로 느껴진다.


프렌사 극장 앞에 오자 한국문화원 직원으로 보이는 분들이 여럿 서 있다. 그중 몇이 나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해준다. 무엇보다 리셉션 직원인 스페인 총각이 내게 다가오며 “올라!” “께 딸?”을 연발한다. 객지 두 달 차인 내가 더 사람에 고픈데, 이 친구가 나를 더 반가워해 주니 역시 스페인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와 포옹을 하고 <신과 함께> 볼 거지?라고 물었다. 그는 개막행사 후 퇴근한다며 나중에 본단다. 이런. 그는 한국사람과 같은 정은 넘쳤지만 일과 생활을 칼같이 분리하는 서양식 사고 역시 투철한 친구였다. 뒤이어 한국 직원이 내게 표를 건네준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스페인에 온 후 처음으로 극장에 들어선다. 이런 감격이!


12회 스페인 한국 영화제, 입장!



프렌사 극장은 정말로 과거 내가 중고교 시절 드나들던 명보 극장이나 중앙 극장의 향기가 느껴진다. 지금의 멀티플렉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감성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이 극장은 영화 전용극장이 아닌 연극 공연장으로 사용되던 전통 있는 공간인 듯했다. 개막작이라 만석이었고 무엇보다 몇몇 한국 관계자들 외에는 모두 스페인 사람들로 객석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커다란 팝콘을 든 채 한국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끽하려는 스페인 커플의 옆에 앉아 그들의 입에서 팝콘이 터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영화를 봤다. 다시 보며 더 즐거웠던 건 스페인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하정우의 '멋짐 터짐'과 스케일 있는 CG 장면에 똑같이 반응했다. 무엇보다 주지훈 역 해원맥의 시니컬한 유머 장면에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역시 잘 생긴 사람의 농담은 좀 썰렁해도 국제적으로 통할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신과 함께>를 보고 다시 147번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며 기분이 묘했다. 김용화 감독님과는 <국가대표> 이후 감독님의 할리우드 진출작을 목표로 만들어진 작가팀에서 만났다. 거기서 8개월 간 월급작가로 감독님과 함께 작품을 개발했지만 결국 할리우드 진출은 미뤄졌다. 이후 감독님이 <미스터 고>를 연출하러 가시며 팀은 해체되었다. 감독님이 고릴라 영화를 택한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 8개월은 무명작가로 생활고를 겪던 내게 큰 안정감과 배움의 기회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감독님은 그때보다 더 엄청난 쌍 천만 감독에 덱스터 스튜디오의 수장으로 계시고, 나는 마드리드에 와 돈키호테를 쫓는 고독한 작가가 되어 감독님의 영화를 다시 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12회 스페인 한국 영화제 '신과 함께' 소개 이미지



감독님도 한국영화도 한국 사람도 모두 그리워진 나는 귀갓길에 참새방앗간처럼 마라뇽 광장의 까르푸 익스프레스에 들렀다. 한국 맥주를 떠올리게 하는 마오우 맥주라도 먹어야 했다. 그렇게 1리터짜리 포탄 같은 마오우 두 병을 사들고 카운터에 내려놓는데 주인아저씨인 듯한 사내가 다가와 단호히 노! 를 외치며 내가 내려놓은 맥주 두 병을 거둬가는 게 아닌가? 당황한 내게 뒤에 줄을 선 스페인 총각이 이곳에선 10시 이후에 술을 안 판다고 영어로 말해주지 않았으면 나는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내가 너무 동안이라 술을 안 파는 건가(설마) 헛갈릴 뻔했다. 나는 스페인 총각에게 맥주가 술이냐는 의견을 피력했고 그 역시 동의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허탈하게 까르푸를 나온 나는 생각해보니 밤 열 시 이후에 거리를 쏘다닌 적이 별로 없음을 깨달았다. 역시 마드리드의 밤 문화를 너무도 소홀히 한 것이다. 그렇다. 버스를 자유자재로 이용한다고 해서 아직 마드릴레뇨(마드리드 사람)가 된 것은 아니다! 역시 갈 길이 멀었다.


잠시 뒤 뒤따라 나온 그 총각은 내게 까르푸는 10시 제한이 있지만 작은 개인 가게는 그 제한이 없다고 말해준 뒤 원하면 가게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를 뒤따라 가 신장이 털리는 게 아닌가 잠시 고민했지만 영어도 잘하고 인상도 선해 보이는 그를 믿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 밤 숙소에서 고독하게 한 잔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그를 뒤따라 마라뇽 광장 뒷길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영화가 풍년이었던 2019년 가을의 마드리드, 스페인 한국영화제는 물론이고 빠라씨또스(기생충)도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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