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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매일 밤 살인을 저지른다.

[나는 나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

by 아메바 라이팅

처음 그런 약을 샀다. 작년 한여름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정처 없이 비를 맞으며 울분을 참지 못하다 약국 문을 연 적이 있다. 그리고 약 한통을 사들었다.


절대 한 번에 다 드시면 안 됩니다.



중년의 여성분이, 아마도 아니 당연히 약사분이겠지, 상투적인 말투로 걱정하는 듯한 충고를 했었다. 고개를 끄덕이다 쳐다보니 이미 뒤돌아 조제실로 가고 없었다. 이내 바로 옆 약국까지 갈 생각이었다.


다른 데서도 사신 거 아니죠?




삼십 대 초반이나 될까 말까 한 젊은 약사가 웃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꼭 한 번에 2알까지만 드세요, 라고 두 손을 약통이 담긴 테이블 위에 올린 채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웃는 얼굴은 자신의 충고에 나를 집중시키기 위한 위장술이었다.


큰 비에 젖은 검은 서류가방에는 수면제 두 통이 들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유명 순댓국집에서 마지막 낮술 한잔을 들고 싶었다. 허연 국물이 들깨에 파묻혀 보글거리는 거품이 힘겨워했다. 한 숟가락 뜨려는 내 설움과 같았다.


조금씩만 드세요.



조선족 아줌마가 두 번째 소주병을 테이블에 옮기면서 내 술잔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왜 다들 관심들이 많지?



죽으려니 검은 그림자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잘도 보이나 보다, 싶었다. 이래서 사람 죽고 사는 게 쉽지 않나 보다, 라고 느꼈다. 그런 관심이 그때 내 처지를 더 서럽게 울렸다. 십 년을 믿고 지낸 직원들이 알고 보니 회사 돈을 야금야금 빼돌린 횡령범들이었다. 그리고 흔적을 숨기려고 회사를 도산에 빠뜨렸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잃었다.


그래도 이제 세상이랑 끝내자.




어렵게 결심해서 처음 이 난리를 쳐보는데 약사부터 순댓국집 아줌마까지 거슬리는 관심과 거드는 한마디 말들이 귀를 간지럽혔다. 게다가 회사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아내의 전화가 북새통을 이뤘다. 순댓국집을 나올 때쯤 결국 경찰의 문자까지 알림음을 울렸다.



그때를 1년이 넘게 지나 난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런데 지금 그때의 후유증으로 약 없이는 잠잘 수 없다. 아무리 잠에 들려해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거센 심장 뜀박질에 부담스러워하며 화들짝 깨어버린다. 악몽을 꾸진 않는데, 가슴과 몸이 새벽이면 심하게 놀라 경기를 일으킨다.


그래서 지금은 수면에 도움을 줄수있음. 이라고 크게 마킹된 수면유도제를 밤마다 먹는다. 약 없이는 하루도 길고 깊이 잠들지 못한다. 잠의 5단계 가운데 3단계도 간신히 오르락거린다.


하루 24시간을 일하던 이전의 30~40대 때와 달리, 이제는 충분한 수면 없이는 낮의 업무와 머리 씀씀이가 결과를 달리한다. 그래서 이제는 살기 위해, 제대로 잘살기 위해, 매일 약을 먹는다.


작년과 약에 내 몸을 싣는 마음은 달라진 게 없지만, 이제의 수면유도제는 나와 가족을 위한 삶의 원천을 위한 것이다. 일 년 전 나를 좌절시켰던 사람에 대한 시선도 이제와 달라졌다. 긍정적이진 않지만, 굳이 예전의 검은 머리 짐승으로 인해 내 삶과 가족이 피해볼 이유가 없다, 라고 마음을 고쳐 잡았다.


세상의 가장 나쁜 놈에게 내가 하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다. 그 놈들 복수하려 자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구 좋아라고 그런 짓을 해? 오래 길게 살며 복수해야지. 나는 머릿속 타살을 결심했다.



짝패에서 본 것 같이 트럭으로 그 자들이 탄 차를 구겨버리는 꿈, 바람의 검심 같이 일본도로 온몸을 난도질하는 꿈, 범죄와의 전쟁에 나온 하정우 처럼 관련된 모든 범인들의 자식들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꿈, 심청전의 정우성 처럼 홀로 늙어 갈 곳 없는 놈들을 죽는 날까지 혹사시키는 꿈, 친절한 금자씨 처럼 몸의 관절을 하나씩 하루마다 끊어내는 꿈. 나는 매일 타살을 실행한다. 매일 살인은 영화처럼 그리면서 마음의 살기를 떼어낸다. 그러면서 자살을 접었다.


그리고 나는 죽으려고 먹으려던 약을, 나는 살려고 다시 고쳐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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