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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미 볼펜과 노란 연필, 그리고 캡슐 커피

[사장은 아무나 하나요?]

by 아메바 라이팅
지난번 저희가 선물드린 만년필로 서명하시죠?



기자들을 불러 모은 대규모 홍보 행사가 국내 대기업과 함께 열 때였다. 국내 IT기업들의 미래기술 시장을 선도한다는 식상한 슬로건을 내 걸었지만, 당시 모두가 손뼉 칠 관례 행사였다. 사람들은 실제 특이하거나 독창적일 때보다 보편적이고 흔하디 흔하지만 시대가 원하는 이벤트를 벌일 때 혹은 그런 일을 실행하는 사람에게 박수친다. 박수란 게 너무나 형식적이고 정형화된 문명의 의식이 되었다.



"미안하다, 어디 뒀는지 모르겠다. 비싼 거라서 서랍에 넣어둔 것 같은데."




'서랍에 잘 보관해 뒀었는데'라는 거짓말로 미안함을 숨겼다. 서랍에 잘 보관해 뒀다는 말은, 그만큼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는 말과 같다. 나는 실제로 이런 식이다. 내가 사용하는 물품들은 항상 내 눈 앞에 두고 쓴다. 내 눈을 벗어나면 그 물건들은 사실상 폐기용품처럼 방치된다. 그래서 난 항상 하나의 용도에는 하나의 물건만 두었다. 그래서 잘 잃어버리지만 반대로 잘 간직한다.


나는 명품 구두도 10년을 신고, 서류 가방도 15년이 되었고, 운동복이나 어떤 셔츠는 20년이 된 것을 지금도 즐겨 찾는다. 그렇다고 같은 용도의 다른 물건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구두는 새로운 명품 구두가 몇 켤레나 있지만 거의 신지 않는다. 1년에 서너 번 정도. 서류 가방은 다른 가방들이 있지만 '아마 어딘가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라는 표현법에 적합하게 내던져져 있다. 그리고 나는 필기구도 3개 이하만 사용한다.


"그냥 이걸로 하지, 하는 수 없다."



기자들의 셧터 터뜨리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에서 나온 소리가 행사장의 전자 음향과 함께 나의 심장을 하늘 높이 헹가래쳤다. 참 소리라는 게 사람을 띄웠다 내렸다 하는 미묘한 장치구나, 라는 게 이런 행사의 주인공이 되다 보면 깊게 느낀다. 옆 자리의 대기업 임원은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 들고 나는 모나미 153 검은색 볼펜을 들어 각자 서명했다. 그리고 다시 서로가 서명한 약정서를 교환한 뒤 다시 내 이름 칸을 채운다. 환한 가식의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한 손으로 약정서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상대 임원과 악수하는 손짓을 크게 반복한다. 기자들을 위해 충분한 시간 동안 같은 표정과 손동작으로 오른쪽, 왼쪽, 정중앙을 돌아가며 포즈를 취한다.


"대표님, 모나미 볼펜은 좀 아니었습니다."








학창 시절, 아마 중학교에서 대학까지, 모나미 볼펜만큼 내 오른손과 함께 한 물건이 없을 것이다. 하얀 플라스틱 몸통에 검은 뚜껑을 끼운 모나미 볼펜. 정식 모델명이 모나미 153이라고 한다. 모나미 153 볼펜은 육각주 모양의 몸체, 원추 모양의 촉 덮개, 간편하게 작동되는 조작 노크, 스프링, 잉크 심 등 총 5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 평생의 친구를 꼽으라면 모나미 볼펜보다 더한 존재가 없을 것이다.


모나미, Monami는 Mon Ami로 '나의 친구'라는 뜻이다.



153은 예수님 말씀을 따라 베드로가 호수에 그물을 던져 낚은 물고기 153마리를 상징한다. 그래서 모나미 153이라는 상표에서는 영원한 나의 친구라는 의미와 예수님의 축복을 함께 새겨 넣었다. 그래서인 모나미 153은 별 것 없는 디자인, 품질, 가격에도 불구하고 50년 넘게 한국인의 친구로 살고 있다.


연필은 사람의 근면함과 지적 욕구를 보여준다. 그래서 항상 연필심을 깎는 사람의 모습은 성실하고 무언가를 탐구하며 연구하는 지적 아우라를 연상시킨다. 반면 반사된 금속성 빛이 사람들의 눈을 감게 만드는 만년필은 영원한 권위의 상징으로 상대를 위축시킨다. 영어로 Fountain Pen이라고 부를 만큼 화수분처럼 계속해서 정해진 양만큼만 절제된 모습으로 우러나오는 것, 그래서 만년필은 완성된 자아를 표출한다.


그렇다면 모나미 볼펜은 어떨까? 우리의 친구로 모나미가 있었던 그 시절처럼,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지극히 보편적인 삶의 하나가 아닐까? 연필처럼 성실하지 않아도 쉽게 쓸 수 있고 지적 탐구나 열정과 상관없는 거래처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휘갈겨 쓰기에 딱 좋은 보통 사람들의 펜이다. 만년필의 권위와는 비교되지 않게 대량 생산된 대중성이 어떤 차별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사회주의적 필수품 같다. 그래서 왠지 사회주의 혁명가가 인민과 함께 하려고 몸에 지니는 펜던트같이 느껴진다.







볼펜을 손에 쥐기 전 초등학생 시절에는 반드시 연필로 필기하도록 가르쳤다. 연필 자루의 몸통을 이루는 나무 재질의 포근함이 한참 글쓰기에 익숙해져야 할 아이들에게 문명의 지름길을 가르켜 줄 나침반 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연필과 연필깎이는 볼펜보다 더한 친구였다. 그러다 중학교 입학을 하면 연필은 보편의 사람들을 뛰어넘는 특정 계급이나 직업군만이 애용하는 특이한 필기구로 변한다.


나도 연필을 사용한 지 불과 1년이 되지 않는다. 지난 35년 동안 연필을 잡아 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서야 모나미 볼펜 옆에 노란 연필을 곁에 두기 시작했다. 볼펜에 비해 선명함이나 명료함이 떨어지고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단점이 크지만, 한편으로 무언가를 쓰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Ritual과 같은 전례 의식을 치르게 해 준다. 약속 장소나 전화번호를 쓸 때처럼 일상의 글자는 볼펜으로 충분한데, 벼르고 벼르는 글을 남기고 싶을 땐 왠지 연필이 더 좋다. 그래서 나는 노란 연필을 사 모았다.


동아연필, 스테들러, 미쓰비시, , 딕슨 디콘테르가 4개의 연필을 문구점에서 두세 통씩 샀다. 아마 내 생애 동안 이 연필들을 다 쓰고 죽을 수 없을 테지만, 이만큼 사용하다 죽고 싶다는 오욕으로 사 봤다. 비슷한 노란 연필이라도 그 필감이나 손의 촉감이 천지 차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내 기분마다 각기 다른 노란 연필을 뽑아 든다. 그렇게 다른 노란 연필을 사용하다 보면, 이 부분에는 이 연필을 고르길 잘했어, 라는 만족에 빠질 때가 늘었다. 그러다 보니 연필에 대한 만족도가 볼펜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내가 움직이는 동선마다 노란 연필들이 나뒹굴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연필을 잡을 수 있도록.







사람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손에 무언가를 쥐기보다 노트북으로 회의 내용을 정리하는 걸 좋아해서 타이핑을 치거나 전자펜으로 디스플레이 화면 위에 디지털 자국을 입력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미개하고 노력하지 않는 루저로 여겼다. 그랬던 내가 종이 위에 올려진 볼펜과 연필을 사랑한다. 이제는 모나미 볼펜과 각종 노란 연필들이 내 기분에 맞춰 손을 채워준다. 마치 시간마다 기분마다 성능 다른 노트북을 호쾌하게 교체하는 호사같다.


사업보고서나 IR자료나 이메일을 쓰기에도 하루가 모자랐던 과거의 나는 글자를 생활에 이용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글씨를 즐기고 글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런 생활을 하게 될 줄이야 나를 포함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내 손과 머리가 다양성이란 촉감을 느끼고 만족할 줄 알게 된 것에 기뻐한다. 그리고 이렇게 소소한 변화지만 변화라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 여유에 깊이 감사한다. 사람 사는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게 맞는 말이다.


요즘 손에 연필을 쥐고 글을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부엌을 향한다. 연필 자루를 한 귀에 올린 뒤 캡슐 하나 뽑아서 커피머신에 집어넣는다. 전원 등이 들어올 때까지 수십초를 기다린 뒤 진한 캡슐 커피를 한잔 들고 다시 테이블에 돌아온다.


단 한번도 나 스스로 커피를 만들어 보거나 커피가 만들어지는 시간을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필 한 자루에서 느끼는 포근함에 캡슐 커피 한잔을 짜내는 기다림을 즐긴다. 사람 참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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