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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애 최고의 날'이란 말, 그만 우려 먹으세요

[사장은 아무나 하나요?]

by 아메바 라이팅

강남 언덕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아주 높이 치솟은 아파트. 그곳에서도 가장 높은 층에서 사방이 투명 유리창으로 뚫린 외경을 바라본다.


해 뜰 새벽이면 잠실 방향 아래에서 떠오르는 선 붉은 태양의 이마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해질 무렵 관악산 너머로 몸부림치는 주황빛을 밀어붙이는 검보란 땅거미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90평이나 되는 이 넓은 아파트에서 하루 종일 태양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홀로 관찰한다. 서성이다 피부를 태우는 오후의 태양에 충전되어 하루를 견디는 로봇처럼, 1년 동안 이 생활을 반복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충전하고 반복할지 모를 일이다.



칼 라거펠트가 말했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웃었다. 지금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애석하게도 이미 지났다. 조용히 이젠 비전투적으로 얌전히 살고 싶다. 다만, 내 인생 행복한 날을 계속해 기대할 뿐이다. 행복과 최고는 잣대가 다른 가치니까.


난 평생 동안 '더 나은 내일, 최고의 성공한 날'을 맞이할 준비만 했다. 그래서 힘들고 포기하고 싶었던 날마다 포기할 용기보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열정을 강요당했다.


난 누릴 만큼 누렸다. 더 이상 누리고 싶지 않다. 남들이 바라보는 기준과 나의 최고의 날을 비교하는 척도가 다르겠지만, 그래서 최고라는 눈높이에 대해서도 만족이 다르겠지만, 난 최고의 날을 과거에 맞았고 그리고 나는 그것을 충분히 누렸다. 이제는 최고의 날을 좇아가지 않을 것이다. 열정보다 용기가 늘었기 때문이다.


늙어가면서 늘어난 것은 용기이고 남은 것은 정신이다. 없어진 것은 열정과 욕망이다. 칼 구스타프 융이 말했듯이, 나이 사십이 넘어가니 정신적 욕구를 실현하고 싶은데 눈길이 우선한다.


아내와 결혼한 지 23년이다. 부부생활의 욕정은 사라져 흔적이 없고 질투심과 소유욕은 가족애로 무뎌졌다. 남은 건 우리 부부의 남은 생애를 지금 만큼만이라도 살면서 무난한 내일을 맞이하는 무딤이다. 나와 아내는 이 무딤에 만족한다.


죽는 날까지 한 달 후 패션 컬렉션 기획으로 밤새우던 라거펠트처럼 내일을 위해 살고 싶지 않다. 더이상 지금의 무딤이 재미 없으면, 헤밍웨이처럼 스스로 정리하고 싶다.


그래서 내 생애 최고의 날 따위는 이제 기억에도 없다. 억지로 기억에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회상하며 미래에 대한 위안으로 삼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미 저만치 지나버린 내 인생 최고를 잊고, 내 인생의 평범함에 만족하며 살고 싶다.


그냥, 대충 살어. 그 만큼 했으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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