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기엌 글자 모양의 엇으로 앉아 와인 두 잔을 나눠 마시던 아내가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내가 아닌 부엌 방향으로 걸어갔다. 와인잔 씻는 소리가 들리더니 글렌피딕 양주를 따 왔다. 양주 잔 하나만 달랑.
난 잔 없어? 혼자 마시게?
아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소파 전방의 TV 화면을 고치며 말했다.
네가 챙겨 먹어! 정신 나간 놈도 아니고 마누라 앞에서 어디 그런 말을 해?
그 찰나에 나는 정신 나간 놈이 되었다. 내 속에 기생하는 정신이란 놈이 가끔 외출해서, 아니 외근 중일 게 분명하다, 자리를 비우는데 그 자리를 어이없는 입방정이라는 놈이 업무를 대신한다. 고질적인 병폐다. 긴급하게 외근 중인 정신에게 연락하여 복귀시키고 입방정에게는 자숙의 명령을 내린 뒤,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말했다.
다시 태어나 다른 여자랑 살게 되더라도, 너랑 바람피우겠다는 말이지.
네가 날 아주 날 바보로 아는구나, 라는 아내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앙칼지게 내 가슴의 중앙을 관통했다. 이미 늦었구나, 라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 어린 시절 아이큐가 측정 불가라던 내 머리는 한낱 장식품이 불과했다. 전전두엽과 편도체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어 이러면 죄의식이 사라질 텐데." 모든 생각의 회로가 엉커 버렸다.
학교 다닐 때, 성적보다 순위가 몇 번인지가 중요했다. 학교 게시판에 풀칠로 붙인 성적 공고에 내 이름이 1등의 맨 위칸에 적혀 있느냐, 아니냐, 만이 학교를 다니는 유일한 목적이었다. 목표가 아니라 분명히 목적이었다. 목표 따윈 없었다. 하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 단지 다니지 않으면 어찌 될 것 같았던 학교는 생활이 되었고 생활을 유지하는 목적으로 전교 등수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공학박사 학위를 받으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이견없이 진학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물론 지도교수로부터 가장 총애받는 능력자로 인정받았다, 박사가 되었고 박사 후 과정도 밟았다. 연구 성과도 좋았고 연구 활동도 각별히 대우받았다. 주변을 채워 준 동료들 모두 항상 나를 부러워했다. 단지, 나의 건들거림과 간헐적 일탈성을 비아냥대긴 했지만 그마저 없었다면 그들이 나와 함께 사는 이 세상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난 간헐적 일탈과 상시적 건들거림으로 그들의 자격지심을 적당히 희석시켜 주었다. 내가 봐도 재수 없게 참 잘났다.
과거의 목적이 목표를 향해 본 적 없었지만, 목적에 비해 미래가 부실하다 느끼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마칠 때 즈음이었다. "내가 직접 사업체를 만들어 키워 보지, 뭐.". 밑도 끝도 없이 새로운 목적을 또다시 만들었다. 능력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운이 좋았다. 목적만 있었으니까. 운에 운이 겹치고 연이어져 왔다. 이것도 능력이다, 라고 착각할 정도로. 곳곳마다 시련의 암초가 정기적으로 놓여 있었지만 결국 사업은 잘 됐고 회사는 상장했다. 그리고 난 사업가에서 기업가가 되었다. 고리타분한 자본 시장에서 경영인 CEO로 변신해 갔다. 마치 카프카의 징그러운 변신 곤충처럼.
방안에 쳐 박혀 죽어가는 변신 곤충처럼 기업가로 살아가는 시간 동안, 나만의 세계가 만들어질 뿐 나와 함께 한 구성원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학창 시절의 간헐적 일탈이나 건들거림도 사라졌다. 권위와 책임만이 나의 공기를 채웠고, 그 공기는 나의 폐 기능 하나하나를 통제했다. 권위와 책임으로 화학 결합된 공기를 쉬지 않고는 내 몸뚱이를 지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점 권위와 책임의 공기에 절박하게 의존했다. 그래서 난 산화됐다. 완전히 연기 없이 번아웃 당했다.
나는 바른생활 사나이 었다. 간헐적 일탈은, 권위와 책임이라는 굴레로 인해 산화되었고 그마저도 공기 중에 먹혀 버려사전적 의미 그대로 바른생활이 이어졌다. 그런데 바른생활은 책임을 더욱 각성시켰고 책임에 대한 각성은 권위라는 도구를 키워서 당위성을 마련했다. 그 속의 나는 영화 설국열차의 맨 앞칸 기관실에 쪼그려 들어간 아이와 같았다. 그래서 난 꿈꾼다.
일탈하는 삶을 살고 싶어, 난 모든 것에 바람피울래.
아내가 양주 두 병을 모두 비웠다. 연애 때도 우리 두 사람의 가장 큰 지출 비용이 술값이었다. 그래서 항상 소주만 마셨다. 그보다 더 싸고 빨리 취하는 술이 없어서. 난 두어 잔 얻어 마셨나, 두 번째 병의 바닥이 투명하게 빛났다. 늙어가는 아내는 요즘 술만 마시면 바로 잔다. 화장실이든 소파 위든 차 안이든 어디든 술이 끊기면 잠을 잔다. 그래서 술이 끊이지 않도록 계속 마시게 해야 하는데, 오늘은 내가 실수했다. 집안에 더 이상 술이 없다.
여보, 난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격정적으로 바람피울게. 알았지?
사랑 담은 눈빛과 그에 어울리는 표정을 한껏 담아 소파 위에 가로누운 아내에게 살포시 내 맘을 전달했다. 그리고 30초쯤 흘렀나, 아내가 잠꼬대 같은 쇤소리를 입 밖에 소리 내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