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여운 할머니들
85세 할머니가 노상에 퍼질러 앉아 쑥을 다듬고 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나를 만난 것이 반갑다는 듯 내 바짓가랑이를 붙든다. 산책하러 나왔던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옆에 퍼질러 앉는다. 할머니는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쑥을 고르고 입으로는 단순작업의 무료함을 고른다. 할머니의 수다는 쑥에서 시작되었다. (중략) 먼 발치에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89세 할머니가 보인다. 우리 옆에 퍼질러 앉은 할머니는 말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쑥을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쑥을 고르기 시작한다. 나와 수다를 떨던 할머니가 바구니를 옆으로 슬쩍 밀어준다. 그렇게 셋이 되었다. (중략) 먼 산에서 한기가 몰려 왔다. 89세 할머니가 손을 털고 지팡이를 짚는다. “아이고 춥다” 한마디 하고 끙차 일어서는데 85세 할머니가 말한다. “안 죽으려면 들어가야지” 일어선 할머니가 응수한다. “쑥 많이 먹고 천년만년 살아라”지지 않는 목소리가 들린다. “들리지도 않으면서 말은 잘하지.” 다시 둘이 되었다. (생략)
이은정 작가의 <쓰는 사람, 이은정> 중에서
책을 덮고도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는 장면이다. 무뚝뚝함 속에서도 정겨움이 잔뜩 느껴졌다. 나도 85세 할머니와 89세 할머니랑 쑥수다를 떨고 싶을 만큼. 잘 들리지도 않고 찬바람이 신경 쓰이는 연세지만 이웃이 쑥을 다듬고 있으면 기꺼이 거들고, 또 그러다가 툭 사라져도 서운하지 않은 그녀들의 연대감은 오랜 시간이 다져놓은 견고한 성처럼 보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솔직히 반갑지 않은 일이다. 나이를 먹는 건 어른이 되는 것과 또 다른 이야기니까. 노안으로 겪는 불편함만으로도 이만저만이 아닌데(이제 안경이 없으면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힘들다), 잘 들리지도 않고 거동도 불편한 내 모습을 상상하면 솔직히 우울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80세의 내 모습을 기분 좋게 그려볼 수 있었다. 쑥을 다듬고 있는 85세의 나, 어디선가 툭 나타나 손을 거들어 주다 또 말없이 쑥 가버리는 89세 할망. 그 둘의 대화. 서로 무심한 듯 보이지만 천년 된 나무처럼 늘 한결같을 두 사람. 그렇게 나무가 되어갈 두 사람. 그리고 누구라도 쉬어 가라고 그늘을 내어줄 두 사람. 그 모습이 언젠가의 나의 모습이라면 나이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어귀에 앉아 쑥을 다듬으며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다. 쑥과 함께 추억도 다듬으면서.
쑥을 그냥 먹으면 쓰다. 하지만 국으로 떡으로 먹으면 맛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날 것일 땐 쓴 인생도 관계 속에서 섞여지고 녹아지고 숙성되면 좋은 맛이 나지 않을까? 따뜻한 국이 되고 든든한 떡이 되어주는 쑥과 같은 인생이라면 나이쯤이야. 그렇게 내어줄 수만 있다면 노안쯤이야. 얼굴 한 번 뵌 적은 없지만 잠시라도 이런 마음을 갖게 해준 85세, 89세 할머니들에게 안부를 건네본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써주신 작가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이런 이웃과 함께 사는 작가님의 동네가 참 궁금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