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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Lapres midi Sep 19. 2023

엄마의 갱년기 나의 사춘기 2

엄마의 갱년기를 무심하게 지나친 딸의 후회록 

“손발에서 열이 나”

“가슴에서 열이 올라와”

“괜히 화가 나고 눈물이 나고 그러네”

“팔이 왜 아프지? 팔이 안 올라가”

“추웠다 더웠다 체온조절이 안 되고 한 번씩 열이 오르고 나면 식은땀이 나”

“얼굴이 화끈거려... 내 얼굴 빨갛지?”

“요즘 잠을 잘 못 자”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쁜 게 좀 이상해”     

언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증상의 말들이다. 물론 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까지는 없겠지만 곁에서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자주 한다면 유심히 지켜보기 바란다. 이 모든 증상이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그 사람은 아마도 갱년기를 막 시작했거나 갱년기의 한가운데서 몹시 힘들어하고 있을 사람이고 그 말인즉슨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할 수도 있으므로.      


나 또한 이런 말들을 숱하게 듣던 때가 있었다. 엄마로부터.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갱년기에 수많은 증상들이 있고 그 증상들로 하여금 삶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철딱서니 없는 딸은 갱년기엔 석류가 좋다 라며 남 일 얘기하듯 했던 것 같다. 석류 하나 사다 드릴 생각은 왜 못했는지(석류즙이라도). 나의 엄마가 갱년기를 지날 때 그녀의 딸은 20대였다. 대학생 땐 노느라 정신이 없었고. 직장 다닐 땐 이미 독립을 한 상태였기에 엄마의 갱년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 막심이다.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다. 속에서부터 열이 오르고, 잠을 못 자고, 일명 오십견이라는 게 어떤 고통을 수반하는지 알지도 못했다지만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인생은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의 총체이다. 비슷해도 같다고 할 수 없는, 유사성 때문에 손해 보는 유일성들이 있다. 갱년기 또한 그것 중 하나이리라.     


사실 앞엣 말들은 요즘 내가 달고 사는 말이다. 내 입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저런 말들이 나가고 내 삶은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다. 한겨울에도 손발에서 열이 나며 선풍기가 달고 산다. 창문에 얼굴만 내놓고 냉기 마사지를 한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숨 고르기를 해야 하고, 평생 불한증이던 내가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는데 머리와 옷이 다 젖는다. 가족들과 다른 계절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역시 나를 닮아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딸은 나를 이상한 엄마 취급을 할 뿐이다.(다 내 죄다!)      

증상들이 하나씩 나타날 때도 있고 한꺼번에 나타날 때도 있다. 그중 가장 힘든 것은 불면증이다. 안 그래도 야행성이라 12시 넘어 잠이 드는데 2시부터 한 시간별로 깬다. 눈뜨면 2시 다시 눈뜨면 2시 30분, 또 눈을 뜨면 3시... 결국 잠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나이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렇게 며칠을 못 자면 이석증이 재발하고, 입안이 헐고 어지럼증에 손발 저림까지... 이미 다른 질환으로 수면제를 먹고 있는데도 잠을 잘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다. 결국 호르몬제를 처방받았다. 이 모든 게 갱년기 때문일 줄 알면서도 병원에서 확진을 받은 날은 씁쓸한 마음이 더해졌다. 이걸 우리 엄마는 어떻게 견뎠을까 싶어 엄마에겐 한없이 미안해진 날이다. 

내 딸은 나의 갱년기에 맞춰 사춘기라는 격동의 시기에 돌입했으니 엄마의 안위를 챙기긴 만무할 터(바라지도 않는다만). 나는 분명 성인이었다. 엄마 나이 오십일 때 내 나이는 스물다섯. 나의 엄마가 나를 낳고 키울 나이였는데 나는 지금의 내 딸과 다를 바 없을 만큼 철이 없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만 아는 그런 딸. 

엄마의 한 시절, 어쩌면 고통의 호소였을 그 말들을 우리는 너무 가벼이 여겼고 그랬던 만큼 엄마는 더 외로웠으리라. 좀 더 일찍 알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한다. 후회한다고 다시 올 시간도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후회한다. 그래서 난 결심한다. 내 딸에겐 그런 후회와 자책을 안겨주지 않기로. 가족들에게 더 명명하게 알려주기로. 지금 난 갱년기가 시작됐고(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런저런 증상들일 있으며 이런저런 증상들로 내 삶이 일그러져 가고 있으니 나 좀 봐달라고, 나 좀 챙겨달라고 콕 집어 말해주기로 결심한다. 나와 동갑인, 여성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고 있는 남편과 사춘기 딸에게 어떤 호소력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우리는 서로 동병상련의 길을 가야 할지도. 그래도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를 드려야겠다. 그때의 엄마 딸이 너무 몰라서 미안하다고. 너무 무심해서 죄송하다고. 


노파심에 당부하자면 곁의 누군가 앞엣 말들을 자주 한다면 지나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갱년기는 감기처럼 며칠 앓고 끝나는 게 아니다. 긴 시간, 삶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어두운 그림자일 수 있다. 안전하게 지나가려면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가족들의 도움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당사자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꼭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혼자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갱년기는 여성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 구성원이 함께 노력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딸들에 비해 남편들은 아내의 갱년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은 갈텐데 오히려 부적절한 대응으로 아내의 우울감에 불을 지핀다.  ... "덥다고 했다가 춥다고 했다가 유난 참...." 이런 말 대신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당신 많이 힘들구나." "내가 뭘 도와주면 좋을까?"
이현숙 작가의 <갱년기 직접 겪어봤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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