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 Lapres midi Oct 06. 2023

덕질로 대통합을 이루다

묵구덕질의 쓸모 


책상 서랍을 열면 지우개와 수첩, 엽서와 펜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뿌듯했다. 내 학창 시절 기쁨의 8할은 바로 문구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교 앞 문방구는 등하굣길의 즐거움이었고 시내에 있는 바른손팬시, 모닝글로리, 아트박스, 알파문구는 주말의 기쁨이었다.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문구들. 노트부터 시작해서 펜과 지우개. 그리고 귀엽고 깜찍한 펜시용품들까지. 용돈이 넉넉지 못해서 늘 아이쇼핑으로 끝났던 그 시절. 그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 돈이란 걸 벌기 시작하면서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문구(펜시)점에 들러 뭐든 하나씩 사곤 했다(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며 쓸모가 없는 것일지라도). 20대에도 30대에도 그렇게 서랍을 채워갔다. 그러다 잠시 공백기가 있었으니 그때는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모든 쇼핑이 육아 관련 제품 위주인 데다 삶의 동선이 집, 마트, 놀이터로 굉장히 단순해졌다. 한 때 모아 뒀던 문구 용품들에는 먼지가 쌓여가고 세월 흔적이 묻어갔다. 펜은 잉크가 굳고 노트는 빛바램이 생기고 지우개는 녹아 끈적거리고... 문구에도 유행이 있어서 왠지 촌스러워 보이기 까지 했다. 잠시 내 곁에 머물다 갔던 미니멈 바람 때문에  그동안 애정으로 소장했던 문구들은 말 그대로 예쁜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다시 문방구 출입이 시작됐다. 아파트 앞 상가의 작은 문방구. 아이는 그 앞을 그냥 지나지 못했다. 500원짜리 캐릭터 카드라도 하나 사야 했다. 이럴 때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걸까? 그렇게 출입이 시작되고 아이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 관심의 범위도 넓어졌다. 캐릭터 굿즈들이 주관심일 때까지만 해도 나의 구매 본능은 잠잠했다. 하지만 아이의 관심이 소품샵으로 넘어가자 사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내 안의 잠자고 있던 문구에 대한 감정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문구가 아닌 편집샵이나 소품샵에서 파는 문구들은 빈티지 감성부터 MZ 스러운 감성까지, 나의 오감을 일깨우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여행 계획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소품샵 투어. 책방 투어 계획만큼이나 촘촘하게 세워졌고 어떤 여행은 목적 자체가 소품샵 투어일 때도 있었다. (심지어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쇼핑만 하고 온 적도 있다)      

문구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생각 너머의 방대한 세계를 알게 되었고 문구의 해외구매까지 이어졌다. 이쯤에선 덕질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모녀의 싸움 이유가 문구 때문일 때도 있다. 나의 귀한 것들을 넘보는 딸. 모든 걸 쿨하게 넘겨줬던 엄마는 이제 없다. 서로의 것을 탐하는 눈빛, 그것을 경계하는 눈빛들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이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고 하지만 이건 결코 유치한 싸움이 아니다. 인스, 마테, 떡메가 뭔지도 몰랐던 갱년기 엄마는 독서용 문구를 기본으로 살림살이를 하나씩 늘려가기 시작했고 기분 울적 한 날은 문방구로 간다. 문구 덕후에겐 신상보다는 기본템이 더 중요하다. 오리지널을 구하는 게 만만치 않으며 문구계에도 명품이 존재해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아무리 문구사랑이 지극해도 갱년기 아줌마가 살 명분이 없는 것이다) 

사춘기 딸과 싸우는 이유가 문구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이 문구 때문에 우리는 대화합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일단 쇼핑의 목적이 일치한다. 여행지든 동네든 누구 하나가 문구점을 간다고 하면 바로 동지애를 뿜뿜 한다. 시댁이 소품샵의 성지 연남동에 위치해 있어서 시댁을 가면 우리는 한마음이 되어 출동한다.(시어머니 눈치가 보여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며느리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총. 그래도 남자 하나가 여자 둘을 이기기는 힘든지 보호자 겸 물주로 우리의 뒤를 따라온다.  아이의 서랍도 엄마의 서랍도 문구들로 넘쳐난다. 아이의 문구는 질보다 양이어서 범람 상태에 이르렀다. 문구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한 나도 눈뜨고 보기가 차마... 하지만 그만 사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럼 엄마도 사지 마”라는 말을 듣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녀가 죽이 맞는 유일한 때가, 불통에서 소통으로 넘어갈 때가 바로 문구 쇼핑할 때인데 이 귀한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느냐는 명분과 책방 인테리어 핑계까지 더해서 엄마의 문구 쇼핑은 오늘도 계속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