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에 책방을 시작하다
기억도 잘 안나는 젊은 시절,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어느 아담한 카페였던 것 같네요.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지인이 물었습니다.
“언니는 나중에 뭐 하고 싶어요?”
저희는 갓 결혼한 새댁들이었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한 처지였을 때였어요. 20년 전이니 강산이 두 번은 바뀌었을 시간이라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결혼관이나 출산에 대한 생각들이 좀 더 진부했지요. 결혼을 하면 시댁 문화에 적응을 해야 하고 1년 전후로 아이를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 가정과 일 중 하나를 이미 선택했거나 조만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인이 물어본 ‘하고 싶은 일’이란 출산, 양육 그 후의 이야기였습니다. 딱 이맘때였을까요?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드는 카페에서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던 우리는 시간을 채우기 위한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누고 있었고, 나중에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전 깊은 고민도 없이 대답을 툭 던졌어요.
“딱 이만한 사이즈에 벽에는 책이 가득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를 하고 싶은데?”
“괜찮은데요? 언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근데 그런 날이 올까?”
웃으며 나눈 우리의 대화는 시간 흐르듯 흘러갔고 시간이 묻히듯 묻혔습니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건 당연하고 가사와 육아를 위해 일은 언제라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그 당시 분위기도 그랬지만 저도 나름 가정에 충실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제가 살림이든 육아든 잘할 줄 알았거든요.(한 번도 해본 적 없었으면서 왜 그랬는지... 그냥 뭘 몰라서였다고 밖엔 할 말이 없네요.)
청년 때 교회에서 결혼과 가정에 대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 탓도 있었을지도요. 지혜의 왕 솔로몬이 쓴 잠언 31장에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나오는 데 무식하면 약도 없다고 저는 그 여인을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 여인은 신사임당도 울고 갈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시대적으로도 굉장히 획기적인 여인이었죠. 그냥 내조만 하는 여인이 아니었던 겁니다.
13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14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
15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6 밭을 살펴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17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18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19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
20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21 자기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하며
22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23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24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25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26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27 자기의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28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당시 저는 이 여인에게 매료되었었고 노력만 하면 이런 여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바보였습니다. 왜 바보냐면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에요. 그땐 누가 제대로 해석해주지도 않았고요. 결혼하고 5년 만에 아이를 낳고 불혹의 나이에 아이의 돌잔치를 하다 보니 시작부터가 좀처럼 쉽지 않았어요. 아이 두 돌 됐을 땐 결국 영양실조에 만성피로라는 영광스럽지 못한 타이틀을 양 어깨에 달게 되었답니다. 보기에도 아까울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위해 내려놓은 내 인생의 부피가 더 커 보였어요.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제 나이 50줄에 들어설 텐데 경단녀의 암울한 미래 그 자체였죠. 그러니 차라리 무언가를 바라기보다 포기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냥 아이나 잘 키우자 뭐 이런 심정으로요.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영양실조와 만성피로가 마흔 후반대에 와서는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로 바뀌었습니다. 코로나까지 맞물려 제가 견뎌야 하는 시간은 길고 긴 터널 같았어요. 집에도 있을 수가 없고 밖에도 나갈 수 없는 시간들. 저는 혼자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책과 책방들 사이를요. 집에선 책 속을 돌아다녔고 밖에선 동네책방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중고서점 밖에 없어서 수원으로 서울로 먼 여행을 다녔죠. 2년을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혼자 떠도는 시간만큼 가정은 등한시하게 됐지만 저도 숨은 쉬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보낸 2년의 시간은 저에게 온전히 스며들었고 어느 날 저는 책방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많이들 물어보세요
“책방을 어떻게 하시게 됐어요?” “준비 많이 하셨겠어요” 등등.
하지만 저는 딱히 대답을 못했어요.
“어쩌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책방 해야겠다 마음먹고 세 달 만에 문 열었어요” 등등
책방을 연 것 자체가 어리둥절할 때라 대답 또한 늘 어리둥절했지요. 제가 책방을 연 당시만 해도 무슨 정신인지 몰랐거든요. 책방을 오픈하고 우당탕한 시간들이 또 6개월 지나고 나니 이제 조금 알 듯해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마침내! 결국은! 해냈다는 뿌듯함보다는 모든 시간이 자연스럽게 흘러 여기까지 왔다는 걸요. 그리고 생각해 보면 전 인생을 포기한 적이 없었더라고요. 제 꿈을 가사와 육아로 바꾼 적이 없었던 거예요. 다만 때가 아니라서 기다려야 했던 거죠. 공부해야 할 땐 공부를 해야 하고 일을 해야 할 땐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꿈을 심고 키우고 충분히 익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고 많은 양분이 필요한데 그동안의 20년은 저에게 꿈이 자라는 시간이었고 양분이었나 봐요.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덜 초조해하고 좀 덜 서운해했을 텐데요. 인생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니 그 부분은 어쩔 수 없겠죠?
그래서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음 해요. 마음에 심은 꿈은 지나가듯 흩뿌려진 것이라고 해도 심연에선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자라고 자라 큰 나무가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좋겠어요. 조바심 보다 느긋함으로 기다린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후회 없이 잘 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꿈은 사라지지 않아요. 포기하지만 않는다면요. 때마침 꽃을 피워준 꿈 덕에 사춘기 딸과 함께 더없이 힘들 뻔했던 갱년기를 감사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답니다. 당신의 꿈도 오랜 기다린 만큼 커다란 나무가 되어 찾아올 거예요. 힘을 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