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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요조는 왜 필명을 요조라 정했을까?

: 요조 [인간 실격]

by 윌버와 샬롯

가수 요조는 왜 필명으로 이 소설 속 요조의 이름을 택했을까?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이름으로 정할 만큼 요조 그에게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는 그의 아내가 겁탈당하는 장면(외도인지 겁탈인지는 솔직히 명확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을 주인공 요조가 목격함에도 그저 괴로워할 뿐 능동적 대처를 하지 않는 데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했다. 그런데도 왜?


가수 요조


문제의 이 남자 요조는 알고 보니 작가 다자이 오사무 그 자체였다. 그가 살았던 2차 세계대전 패전이라는 일본의 시대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기 버림과 절망에 대한 그 모든 것을 단지 부끄러움과 부적응으로 치부해버리는 자기 연민이 달갑지 않다. 더구나 죽음의 자발적 실행은 꼭 누군가와 함께(이 또한 당시 일본의 시류라 한다지만)였던 것이 비겁하고 겁쟁이로 느껴진다.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가 있기는 하다.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기도 하다. 성에 차지 않고 불만스러워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때도 분명 누구에게나 있다. 허나 의도치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빠진 여러 여성을 이용하며 기생하는(이런 나쁜 남성에게 기꺼이 빠져 버리는 여성 역시 만만치 않게 탐탁지 않지만) 이런 잉여인간이 딱 소설에서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싱크로율이 너무나 비슷한 사람, 즉 다자이 오사무가 그렇게 살았었다. 더구나 그 말고도 언제나 어디에서나 안타깝지만 세상에는 그런 이를 쉽게 볼 수 있기 마련이다. 말도 안 되는 사건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뉴스에는 얼마나 버젓이 등장하는가.


다자이 오사무


기괴한 3장의 사진으로 시작한 전도유망했던 한 사내의 삶이 결국 정상으로 돌아오는 결말을 난 아마 기대했었나 보다. 자기를 감추는 도구로서의 익살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람임에도 결국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함에 씁쓸하다. 문학 평론 차원에서 말하는 소설 속 요조와 작품 혹은 작가의 가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한 인간의 서사를 그것도 27년이라는 짧은 생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며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가 별로임에도 요절이라는 이야기 끝은 마치 옆집 사내 얘기처럼 안타깝게 다가온 건 무슨 감정일까. 가수 요조도 나와 같았을까.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없이 나약하여 나락으로 빠지는 요조에게 연민을 느낀 걸까. 어쩔 수 없는 작은 인간의 처절함에 매료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매번 버리려 했던 시도는 바로 요조 스스로가 말하는 인간 실격의 방증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다 해도 살아야 하며, 살아 있어야 비로소 기본 된 인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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