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머니이기도 한 피해자들이 행복하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부족한 소설을 세상에 내보낸다.” (‘작가의 말’ 287쪽)
소설 초반부터 계속해 읽을 수가 없었다. 읽다가 힘들어서 덮어두고 또 읽다가 머리가 아프면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읽었다. 그러다 겨우 읽기를 마무리했다. 먹먹하고 답답한 마음은 책 말미의 ‘해설’과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니 그제야 눈물샘이 터졌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위안부 일을 이 책으로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끔찍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힘들었겠지’하는 하나의 말로 어찌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지옥이다. 이 모든 얘기가 소설을 넘어 진정 사실이라는 것에 더 진저리 쳐진다.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의 속도. 구절구절마다 내 뼈마디가 아파왔다. ‘애기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라는 열두, 열셋의 나이의 아이가 나오면 그 나이 때의 내가 떠오르고, 물끄러미 그 또래인 딸도 쳐다보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런 아이가 어떻게 그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증언을 토대로 하고 그 어구마다 미주를 다는 식의 소설 방법은 신선하다. 그리고 영리하고 솔직한 방식이다. 처음에는 그 미주에 달린 숫자의 의미를 모르다가 뒤에 나오는 그녀들의 이름을 보고 나서야 이 많은 말의 실체와 진실 그리고 그 생생한 참혹함이 더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316개의 진술. 숫자가 계속 늘어날수록, 이 말이 진짜라고 믿을 수 없는 구절에마저 숫자가 달려 있을 때는 정말 말을 이을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이유도 모른 채 당하는 그 심정은 어떠할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도 숨어서 살아야 했던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떠할지 상상이 안 간다. 여태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몰랐었고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오직 나 홀몸이니
거칠 것도 없고
그 모진 삶 속에서
하느님이 오늘까지 살려둔 것은
이를 위해 살려둔 것.
죽어버리면 그만일 나 같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하게 세상을 못 살아왔는지.
내가 피해자요.” (144쪽)
달려가 할머니를 꼭 안아주고 싶다. 내 딸에게처럼, 내 엄마에게처럼 꼬옥. 그리고 말하고 싶다. 할머니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여태 잘 알지 못해 죄송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너무 죄송해요.
“한 명은 한 명을 만남으로써 ‘한 명들’이 된다. 한 명이 ‘한 명들’이 될 때 기억은 역사가 된다. 그렇다면 그녀와 함께 20만 명을 만나러 가는 또 다른 한 명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 독자들이 아닐까?” (‘해설’ 284쪽)
영화 ‘안시성’에서도 느꼈던 전쟁 속 미물 같던 하나하나의 ‘한 명’들. 과연 전쟁은 무엇을 얻고자 사람을 개미 떼처럼 가벼이 여기고 희생시키는가. 그 ‘한 명’보다 더한 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과거뿐만이 아닌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 분명 벌어지고 있을 폭력, 무가치한 무엇을 얻고자 자행되는 그 모든 폭력과 전쟁을 증오한다.
한낱 동물보다도 못했던 ‘한 명’의 존재를, 늦었지만 나도 ‘한 명들’ 중 하나가 되어 기억하고 역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소리를 더 높이고 ‘한 명들’ 옆에 당당히 서 있어야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