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말미에 보건 의료 학생 모임 소식지에 쓴 저자의 글을 보고 ‘김승섭’의 인품에 크게 감화되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다는 것, 거기에 약한 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만의 방식으로 함께 싸워주고 있다는 것에 감동받았다.
저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지만 보통의 의대 졸업생이 밟아가는 길을 가지 않았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천성이라 생각해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삶을 택한다.
경험이라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또 한 번 알았다. 그는 의과대학 시절부터 사회문제와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진 듯하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80년대처럼 혈투하며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저자는 내적 갈등이 있었다. 세상을 좀 더 인간다운 곳으로 변화하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뜻을 같이 하고 함께 가는 동료들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내 마음을 이끌고 있는가.
저자는 그런 고민을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하며 이미 내공을 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학생 시절 재활병원에 있는 사지마비 아이들의 점심 식사를 먹여주는 활동을 하며 살아 있게 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 의과대학 본과 때 수업을 빠져가면서도 친구와 함께 한 교도소 재소자 건강에 대한 연구를 하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던 것, 이후 공중보건의로서 교도소에서 근무한 경험 등 그 모든 내력이 현재의 그를 있게 한 것 같다.
단단한 숫자
저자는 본인이 수집하고 연구하는 이 데이터를 단단한 숫자라고 표현한다. 그가 모으는 숫자는 구하기도 어렵고 예민한 수일 수밖에 없다. 어떤 재정 후원도 정부의 지원도 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수, 아니 허공에 날려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그 수를 그는 담아냈다. 그는 그것을 꾹꾹 눌러 담아 연구하여 논문을 쓰고 사회에 내놓는 연구자다.
데이터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느끼게 한 책이기도 하다. 논리를 주장하기 위해 데이터가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 차이다. 그저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만으로는 주장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미처 몰랐었는데 우리나라는 보건 의료와 관련된 사회역학의 시작이 한참이나 늦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그 쉽지 않은 길을 저자는 택했고 개척하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가 말하지는 못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다.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소수자이기 때문에 겪는 재난 불평등의 현실을 읽으니 복지를 실천하는데 좀 더 예민하고 깊이 있게 접근해야 함을 느꼈다. 미국의 베트남 참전용사들보다도 더 아프다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거대 기업의 술수에 조용히 죽어가던 노동자, 공공안전을 지키는 소방공무원의 아픔과 인권 등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 못 하고 질병을 더욱 권하고 있는 일터가 아직도 존재함이 가슴 아프다. 세월호 참사, 성소수자 등 아직도 무너지고 있는 그들의 속내에 우리는 너무나 무지했다.
한 사회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통 아니냐는 어느 인터뷰 질문에 저자는 여러 기억이 밀려오는 듯 울컥, 눈이 붉어졌다는 기사를 봤다.
“그래도 전 자기 싸움을 하니까 행복합니다. 행복해야죠. 만화 ‘미생’에 그런 말 나오잖아요. 복잡한 현대 사회에 자기 싸움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전 그걸, 소위 말하는 ‘명문대 정규직 이성애자 남성 교수’라는 아주 좋은 위치에서 하고 있으니 행복하다고, 더 잘하겠다고 말해야겠지요.”
“그간 연구에 매달리느라 몸이, 마음이 많이 망가져서 좀 쉬려고 한다. 스스로 아슬아슬하다고 느꼈던 적이 많다.”
“세월호 연구, 성소수자 연구, 그런 연구들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주 작은 자극에도 더 크게 반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놀란 적이 많다.” *
여전히 힘들겠지만 저자가 많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데이터가 말하는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동조하며 응원해 준다면 그도 힘이 나지 않을까. 앞으로는 ‘김승섭’의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며 귀를 기울일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인용하면서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기심을 채우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결국에는 이기심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보도록 해요. 저도 열심히 노력할게요.” (본문 p. 305)
필자가 쓴 보건 의료 학생 모임에 전하는 위의 글로 책은 마무리된다. 각 개인이 이기심을 뛰어넘는 삶으로 모두 귀결된다면 공동체는 아니 나아가 국가, 세계까지 어떤 갈등이 생기겠는가.
이 아름다운 청년 김승섭을 응원한다. 그가 가고 있는 길에서 끝없이 정진해주길, 이 사회에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여러 단단한 숫자를 계속 만들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