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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by 윌버와 샬롯


늦도록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저자가 삶의 마지막으로 내달리고 있는 책 종결 부분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아무도 가보지 않고 경험하지 못해 말해줄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 아이가 “엄마,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질문을 해도 “엄마도 알 수 없지. 그저 지금 현재를 사랑하고 열심히 사는 거밖에 엄마도 방법을 몰라.라는 매우 부족한 대답만 해 줄 수밖에 없는 그것, 바로 죽음이다.


이 책은 죽음에 직면한 서른여섯 전도유망했던 한 신경외과 의사의 생생한 자기 고백서다.


​매일 외면하게 된다. 그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이 감당이 안 될 거 같아 죽음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자꾸 외면해 버린다. 어떤 병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건강함에도 생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 있을 때 느낄 미래의 그 순간을 어렸을 적부터 가장 큰 공포의 순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언젠가 닥칠 그 순간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 또 그 답을 찾고자 책을 부단히도 읽는지 모른다. 도대체 어떤 책을 본다면 죽음으로부터의 공포를 초월할 수 있을까? 종교를 가진다면 좀 나아질까? 그 순간을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그저 살아있을 때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그런 메시지는 얻는다. 하지만 생의 끝을 평온히 맞이할 내공의 그만한 나이가 아직 아닌 건지 죽음은 여전히 외면하고 싶은 가장 두려운 단어다.




​실제로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연봉, 근무 환경, 근무 시간을 고려하여 직업을 선택한다. 그러나 원하는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고 선택하는 건 직업이지, 소명이 아니다. (93쪽)


​저자 폴 칼라니티는 문학으로 시작한 학문의 세계에서 신경외과 의사로서 직업 그 이상의 소명을 가지고 나아간다. 분명 그의 일은 소명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폐암 발병과 그 이후 항암치료, 그러고 나서 다시 병원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난 그도 그의 아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완치가 아니던 그때 그런 선택이 더욱 병의 재발을 재촉한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병으로 침잠할 것인지, 여력이 닿을 때까지 현재 일과 삶 그리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계속 탐구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이 더 옳거나 그른 것은 없을 것 같다. 결국 폴은 후자를 택했고 일에 충실히, 아니 더욱 온몸을 다해 해내간다. 그런 그의 모습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그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수술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왜냐고?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나니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179쪽∼180쪽)


​하지만 수술용 드릴을 다시 잡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했다. 도덕적인 의무에는 무게가 있고, 무게를 가진 것은 중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생사가 걸린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가 나를 다시 수술실로 끌어당겼다. 루시는 내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182쪽)


​그러나, 시작할 때는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수술을 마치고 나오며 이 일이 끝났음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라는 동료의 인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다는 예감에 그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그래서 원했던 이상적 삶이 바로 코앞인데 결국 돌아온 것은 죽음, 그는 한 번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히포크라테스나 마이모니데스, 오슬러도 가르쳐주지 않은 뭔가를 배웠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 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197쪽∼198쪽)


​결국은 죽을 테지만 그 순간이 몇 개월 후일지, 몇 년 후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미래와 도전을 시작할 수 없는 그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폴 칼라니티는 절망의 순간에도 의사로서의 소명을 깨닫는다.


실존적 상황을 마주 보도록 도와주는 것, 훗날 내 죽음 앞에서도 의사이든 아니든 그런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적어도 가족에게만이라도 내가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도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다. 그 메시지는 간단하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졌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234쪽)



태어난 지 8개월밖에 안 된 딸과 부인을 옆에 두고, “난 준비됐어.”하며 폴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결국 마지막으로 깊은 숨을 내쉰다.


책 말미에 담담히 써 내려간 부인의 에필로그는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폴을 지지하고 지켜준 부인, 그리고 그의 가족 모습도 뭉클하다. 책을 덮기 전 생전 어린 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한참을 본다.



폴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성찰, 의사로서 그리고 환자로서 말한 솔직한 고백은 다시 한번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 준다. 어떤 것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걸까? 규율을 목숨처럼 지켜야 할 것처럼 아이에게 다그치던 많은 순간순간이 모두 먼지처럼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오늘 하루, 누구에게나 똑같은 가치의 하루지만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보내게 하고 있는가.


내 숨결 또한 바람이 될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인사를 해야 할지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보낸다. 아직 완벽한 답도 찾지 못했고 두려움도 여전하지만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중얼거리며 나는 폴을 생각한다.


폴, 수고했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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