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목을 뭘 그렇게 어렵게 지었나 싶었다. 무슨 뜻인지도 한눈에 모르겠고, 솔직히 첫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인가 보다 했다.
그냥 채널을 돌리다 딱 한 장면을 보게 됐다. 화장실 변기에서 커피 원두를 두 손 가득 떠 담는 한 남자를 말이다. 이잉, 이게 뭐야? 그때까지는 그 장면이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
남자의 딸은 카페를 운영하는 바리스타인가 보다. 우연찮게 방구석에서 신문지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커피 원두를 발견한다. 딸은 그 향을 맡더니 감탄을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딸이 발견한 신문뭉치에서 다른 것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드라마 앞뒤 사정 모르는 난 아빠가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화장실 변기에서라면 당연히 볼 수 있는 그것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아, 이제 눈을 감아야 하나, 모자이크 처리는 했겠지 하며 순간 실눈을 떴드랬다. 변기에서 커피 원두를 담는 이전 장면은 그저 남자의 판타지려니 했다.
자꾸 커피콩이 보이니 그때서야 깨달았다. 루왁이 뭔지, 루왁인간이라는 제목이 무슨 뜻인지를 말이다. 루왁커피라 했으면 바로 알아들을 말이 인간이라는 단어와 조합되니 내겐 생소한 용어가 됐던 것 같다.
알고 나서 보니 아이디어가 참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그 참신함때문에 드라마를 남다르게 좋아하던 예전의 내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 시절 꼭 챙겨보던 MBC 단막극 '베스트극장'과 함께말이다.
베스트극장은 단연 단막극의 꽃이었다. 한 시간 남짓하는 완벽한 극본의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짧다면 짧을 그 시간을 아련이면 아련, 코미디면 코미디, 스릴러면 스릴러로 너무도 꽉 채웠던 드라마였다.
미니시리즈, 연속극도 좋아했지만 단막극은 다음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그 일회성이라는 완성이 특히나 좋다. 주옥같은 작품은 오롯이 한 회만으로도 충분했다. 한 때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의 8할은 베스트극장의 영향이었다.
요즘도 정기적으로 방송되는 단막극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시간대가 많이 늦은 때인 건지 보기가 힘든 것 같다. 프로그램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 건지 보지 못해 뭐라 평할 순 없지만 '루왁인간'을 보니 예전 베스트극장만큼의 단막극 드라마가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진 것 없는 부모가 자식에게 뭐라도 주고 싶어 안간힘을 쓴다. 내 한 몸 비틀어 고혈을 짜내듯 힘을 주는 남자를 루왁인간으로 표현했다.
부모가 돼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겠다. 내가 조금 더 가지고 있는 부모였다면 그렇게 아이에게 닦달을 할까. 아이한테 힘이 되어 줄 수만 있었어도 이렇게 우악스럽게 아이에게 조급해했을까. 나중에 좀 더 든든한 배경이 되지 못할 것 같아 더 아이에게 성장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금수저 부모가 못돼서.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가 뒤처질까 봐 그 불안함 때문에.
남자는 말한다. 너한테 줄 수만 있다면 내 눈도 뭐든 다 주고 싶다고.
죽어라 일했어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퇴직을 당한 남자에게 딸은 말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남은 거라고.허탈해 말라고. 나 잘 컸지 않았냐고.
작가의 발상이 참 기막히게 좋았고 잘 쓰이고 연출된 작품이다. 번득이는 이 이야기는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가 끝나고 올라가는 자막을 보니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당선작이었다.역시나!
마지막 화장실 씬. 끝까지 실망시키지 않는다. 완급과 반전을 아는 작가다. 시청자를 들었다 놓을 줄 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 난 정말 그 끝은 남자의 평범한 원상복귀 그것만 생각했다.당연히 변기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 이제는 진짜 보이지 않을까 또 한 번 눈을 지그시 감았더랬다. 근데 기분 좋은 뒤통수를 된통 맞았다.
"요새 금 시세가 얼마지?"라며 남자는 웃으며 드라마는 끝나지만 그게 단순히 어떤 판타지였든 상관없다.뭘 그렇게 열심히 일했냐며 핀잔을 주는 세상은 적어도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어찌 됐든 결말은 역시나 해피엔딩이 좋다. 끝은 아무쪼록 모두가 기쁘게 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우리의 새해도 그렇게 모두 금이 두 손 가득하게 마땅한 보상을 받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