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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리더십

: 카라얀과 번스타인

by 윌버와 샬롯

클래식은 몰라도 이 두 지휘자의 이름이나 얼굴은 익숙할 것이다. 세기의 라이벌이라 부르는 이 둘은 서로 다른 리더십을 보여줘 사뭇 흥미롭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08년 모차르트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사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 신동 소리를 듣는다.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지만 스승의 권유로 지휘자 길을 걷게 된다.



지휘자 모습의 대명사격 사진, 눈을 감고 지휘하는 카라얀 모습을 음반 레코드점이나 피아노 교습소 같은 곳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지휘자보다도 카라얀의 모습이 더욱 각인되는 것은 미디어에 대한 그의 집착으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클래식은 현장에서 직접 연주하고 듣는 것만이 진정성 있다는 기존 인식에서 카라얀은 LP 시대의 녹음 기술을 십분 활용해 클래식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다.


이후 LP에 이어 SONY 사와 함께 CD 시대까지 탁월한 선견지명으로 지휘자로서 그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한다. 키가 작은 탓에 지휘하는 모습을 찍을 때는 상반신 위주로 찍기를 주문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카라얀 본인이 직접 영상 회사를 차렸다는 사실은 미디어를 활용해 자기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사후인 아직까지도 매년 약 18억 원이 넘는 로열티를 벌어들인다고 한다.


반면에 화려한 모습 뒤로 독선적 카리스마를 지닌 카라얀이 존재하기도 한다. 나치에 부역했다는 오명도 안고 있으며, 30년 넘게 종신 지휘자로 있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는 단원들과 절대 사적인 식사나 만남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라얀은 철저히 공과 사를 구분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교감하지 않는 카리스마는 결국 말년에 단원들과의 씻을 수 없는 불화를 남기게 된다.

번스타인은 카라얀과 비교하는 지휘자로 많이 언급된다. 어느 인터뷰에서 “당신이 카라얀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번스타인은 “내가 그보다 10년은 젊고 키가 좀 크다.”라는 유쾌한 대답에서도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1918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발소를 경영하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걸어간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이 키운’ 최초의 세계적 지휘자가 되었다.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등 다양한 곳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그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작곡하는 등 클래식 이외 음악 활동으로 어렵고 고상하다는 기존 클래식을 대중음악과 크로스 오버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번스타인은 통섭의 선두주자였던 것 같다. 혼자 종횡무진 피아노도 연주하며 설명하고 진행한 청소년 음악회를 통해 클래식을 대중화하는데도 크게 일조한다.


카라얀과 비교하는 대목은 번스타인은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단원과 연주 연습할 때는 기본 한 시간 정도는 사적인 대화로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등 배려하고 소통하는 마에스트로였다.


30년 넘게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종신 지휘자로 지낸 카라얀과는 다르게 번스타인은 전성기를 맞은 뉴욕 필하모니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약했다. 단원에게도 다양한 지휘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성장을 도왔고 본인도 더불어 그런 음악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것이 아닐까 싶다.

​20세기 후반 클래식계 동시대 최고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을 라이벌 구도로 많이 회자된다. 독재적 카리스마, 소통의 카리스마로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성향은 달랐지만 둘은 젊은 시절 서로 상대방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한다.


이 둘이 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지만 그 리더십 방식은 서로 달랐다. 어떤 지도자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 얼굴은 카리스마, 가슴은 소통으로 무장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가 우리에겐 과연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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