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시작할 때만 해도 기대가 참 컸다. 계획한 일도 여럿 있었다. 2020. 연속하여 나열된 이 숫자는 얼마나 단정하고 보기가 아름다운지.
그 이쁜 2020은 망했다.
뭐 나만 망한 게 아니니 위로가 될까. 나만도 아니고 우리 가족만도 아니고 거기에 우리나라만도 아니고 완전 월드클래스급으로 전 세계가 멈췄으니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린 망하지 않은 것 같다. 모두가 똑같이 겪고 있는 셈이니 실은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다. 너무 비약이 심한 걸까.
그러나 표면상 모두가 같은 재앙을 겪고 있다 할지라도 그 피해를 느끼는 정도는 천지차이다. 어쩌면 여태 잘 보이지 않던 것마저도 그 격차를 더 선명하게 보이게 한 것은 아닌지.
일자리. 교육. 방역. 의료. 이제는 백신마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세상은 우주여행을 갈 수 있는 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지만 분열의 역사는 그 대상에 대한 이름만 바뀌었지 더 처절하고 극렬하게 나뉘고 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떠오르며 난 과연 몇 번째 칸에 있는 건지 가늠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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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다가와도 언제부터인가 그날이 그 날 같아 별 감흥이 없었다. 12월에 들어서면 아이가 어릴 때는 빼놓지 않고 설치하던 트리도 그냥 창고에 처박혀 두기 일쑤였다.
그러나 올해는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연말 분위기를 집에서나마 내려한다. 트리와 장식품을 창고에서 꺼내고 아이들을 불러 같이 꾸며보자고 꼬셔본다. 아이는 처음엔 시큰둥하지만 이제는 제 키보다 작아진 트리 꼭대기에 별도 올리고 빨간 방울도 단다. 마지막에 전구 스위치를 짜잔 켜니 오래도록 아이는 트리를 바라본다. 트리 멍. 불멍만이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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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 하나로 거실이 따듯해졌다. 이제는 음악이 필요하다. 요즘 우리 집 배경음악은 캐럴송이다. 아마존 알렉사에게 캐럴송을 들려달라고 하니 옛날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재즈풍의 캐럴송이 계속 흘러나온다. 아마존 프리 버전만 들을 수 있으니 비슷한 풍의 노래 반복은 감수해야 한다.그래도 그 음악은 올드하지만 달콤한 커피 향이 가득하고 누구나 반길 것 같은 포근한 어느 카페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 그거로나마 이 울적한 일상에서 조금은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니까.
연말이면 가족들이 모여 맛있는 거 나눠 먹으며 새해 달력도 나눠 갖는 그런 날을 이번엔 기대할 수 없다.일 년에 한 번 1박 2일 짧은 여행으로 만날 수 있던 소꿉친구들과의 송년회도 자연스레 올해는 그냥 넘길 것 같다. 연말이라는 좋은 핑계로 동네 친구들과 평소에는 잘 가지 못하던 맛집에서 회포를 풀던 모임은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을 꺼내지않는다.계획이라는 게 아무 소용이 없는 때이니까.
결국 남편도 재택근무에 들어갔고, 아이들은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요즘이다.엄마의 부엌은 일 년 내내 바쁘다.
그러니 스스로라도 쥐어짜 기분을 내본다. 갈 데도 즐길 것도 없으니 집콕 최적화를 고안해야만 한다. 이 지구 상에서 오롯이 우리 가족 네 명만이 같은 곳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으니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오늘을 견딘다.
트리 아래가 허전하다. 알록달록 예쁘게 포장된 선물상자를 놓으면 그럴듯하겠지만 마땅한 게 없다. 대신 이사하면서창고에 고이 모셔놓은 고만한 크기의 폭신한 인형 몇 개를 꺼내 옹기종기 앉혀 놨다. 없는 것보다는 나름 데코 효과가 난다. 비록 뉴욕 호텔 '나 홀로 집에' 캐빈의 스위트룸 거실에 설치한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이 깜빡이는 트리 전구가 애써 고맙다. 아무것도 못하고 보내버리는 2020년이지만 그나마 먼 훗날 이 겨울을 희미하게나마 반짝이게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올 크리스마스 때도 캐빈이 나오는 영화 '나 홀로 집에'를 여지없이 보게 되겠지. 몇 번을 봤는지 셀 수도 없지만 이 영화만큼 크리스마스임을 자인하는 것이 또 있을까. 어느 장면에서 어떻게 당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뜨악하며 또 보게 되는 이 영화. 캐빈에게 된통 당하는 아둔한 도둑을 보며 '저 정도면 죽어야 하는 거 아냐'하며 이제는 너무나 잔인한 응징에 영악한 캐빈을 도리어 탓하며 우리는 또 낄낄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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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눈이 내릴까? 11월 말부터 난 첫눈을 기다린다. 누구나 나 같은 마음일 줄 알았는데 눈이 내리면 현관 바닥 타일도 지저분해지고 차도 닦아야 해서 싫다고 하는 어느 지인의 말에 잠시 머쓱했다. 운전을 못해서 그런지 난 그래도 첫눈이 늘 설레는데.
라디오에서는 계속 눈이 오게 해 달라는 캐럴송이 나오고 내게도 아직 첫눈이 오지 않았다. 카톡 프로필에 내 감정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번엔 특별히 눈이 내리는 기능을 한 번 써봤다. 내 마음에도 그제야 눈이 내린다.
그렇게 난 소소한 노력을 기울이며 이번 겨울을 보내고 있다.
같은 시련을 겪었더라도 감사 일기를 쓰는 자는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 더 크다고 한다. 2020년은 이렇게 마무리되겠지만 여전히 우리가 괜찮음에 감사한다. 새로 맞이하는 비대칭의 새해에는 부디 일상의 소중함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들의 카톡 프로필에도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다. 너도 엄마 마음과 같구나. 배경 음악은 제 나이답지 않게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가 올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