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각자가 고요를 대하는 방식

2025 서울여행 #2

by 훈자까

마음에 고요가 자리매김한 지 금방인데, 어느덧 바깥의 풍경은 어둑해졌다. 터미널 도착 시간이 5시쯤이었으니, 숙소인 신도림까지 오는 시간을 계산해 보면 그럴만했다. 얼마 전 장만했던 퍼 재킷을 입고 거리를 나섰다. 오늘 저녁은 오랜 고등학교 친구가 밥을 사준다고 해서, 고속터미널에서 보기로 했다. 다시 그곳으로 옮기는 발걸음에는 산뜻함만이 실렸다.


확실히 서울의 저녁은 높고 화려했고, 수다스러웠다. 내리쬐는 불빛만큼 저기 저, 어둑한 부분에는 냉담한 개인주의가 깔린 듯했다. 그렇게 개인주의의 더욱 아래에서 덜컹거리는 지하철을 탔고, 친구를 만났다.


데려간 곳은 '텍사스데브라질.' 고급스럽고,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이었다. 실제로도 커플과 가족 고객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셀프바도 종류가 많았고, 고기는 종류별로 그때마다 구워서 테이블에 가져와 직접 잘라주는 형식이었다. 퍽 마음에 들었다. 디너는 가격대가 좀 나가지 않을까 했으나, 친구는 이전에 받은 식사권을 드디어 쓴다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샐러드류를 먼저 고집하고 이후에 고기를 먹는 나를 보고, 친구는 네가 더 서울깍쟁이 같다는 소리를 했다. 약간 질린 듯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탄수화물을 절제하고 혈당에 민감했기에 식습관을 최대한 건강헤가 가져가려고 했다. 뭐, 좋은 게 더 좋은 거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올 무렵, 하나둘씩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기마다, 그리고 매일마다 단체 메신저에서 시답잖은 만남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라서 서로에게 전혀 모르는 내용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만나서까지 이야기를 한다는 건, 현재 각자의 관심사가 그쪽에 쏠려있다는 이야기였으니.


나이 서른. 모아둔 자산도, 경력도, 업무도, 즐기는 취미도 모두 다르지만. 현재 서로 무직, 백수라는 상황은 동일했다. 그래서 친구는 남아돌 수밖에 없는 시간들에 몹시 불안해했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고요를 바랐으나, 그는 고요함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환경적으로 친구는 항상 고요함에서, 무언가를 이뤄내야 했으니 나는 공감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친구의 문장에는 감정이 그대로 다 묻어있었다.


'우리 이제 나이 서른인데. 와, 이렇게 빨리 흘러가도 되는 건가? 괜히 퇴사했다는 생각도 들고. 대표님 찾아가서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 불안하다, 불안해. 뭔가 이제 딱 첫걸음을 뗀 거 같은데. 쉽지가 않네.'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가감 없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스스럼없이 말을 꺼냈다.


'나는 뭐. 물욕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아서. 잔잔하게 소시민적인 삶을 꿈꾸는 면이 있지. 그런데 참, 가장 큰 흥미가 있고 경제활동으로 하고 싶은 일이 내 취미에만 그쳐 있어서. 이전에 일했던 업무가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은 절대 아니고, 오히려 꽤 부합하는 부분들이 많긴 하지만.'


'솔직하게 이제는 글작가가 된다고 해도 그 수입만으로 생활을 영위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자신감이 대폭 줄은 건지, 눈이 더 현실적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정체성과 해야 하는 일이 다른, 이런 애매한 재능을 가진 내 모습의 괴리가 사라지지가 않네.'


우리 사이에 위로라던가, 감정적인 소감은 필요하지 않았다. 또 경상도 특유의 투박하면서도 현실적인, '지 인생은 지가 알아서 하겠지.'가 오랜 모토였으니. 단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에 재밌어했을 뿐.




육해의 것들로, 정말 오랜만에 배가 아플 정도로 먹고 식당을 나왔다. 아까 친구가 떠들어댄 불안감처럼, 하늘은 엎질러진 먹물 같았다. 마치 우리들의 선택으로 실현된, 암담한 결과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하늘 아래에는 수많은 다이아몬드 창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 주의 중간쯤에 당도해 있는 이 시간에도, 저 창들 안에는 엎질러진 것들을 닦아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현실을 잠깐 제쳐두고, 소위 말하는 '현타'가 와서 발걸음 한 서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당도한 저녁부터 현실을 재조명시켰다. 잊지 말라는 듯이. 땅바닥에 부딪혀서 터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높게 튀어 오르려고 온 것이라고.


매도 먼저 맞으니 좋다. 맵고 얼얼한 이 느낌이, 기다리는 일정에 더욱 낭만을 불어넣은 듯했다. 그러곤 친구와 짧게 인사를 마치곤 숙소로 다시 바쁜 걸음을 옮겼다. 당장 시작될 내일부터의, 나만의 생활이 어여 오라 손짓 했으니까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대한 고독, 잔잔한 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