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일의 동기부여 #06
어느덧 신년의 긴 연휴, 설날이 찾아왔다. 누구는 계획한 휴가를 기대하며 결재를 올리고 또 어떤 이는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던 날들을 회상하며 달콤한 휴식을 바랄 것이다. 나에게 연휴 기간은 계획이 많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산뜻하게, 보통 이와 다를 바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각자 다른 지역에 있어 1년에 잘 봐야 두세 번 보는 친구들을 만나는 등 항상 그래 왔던 보편적인 일정을 보냈다. 또 종종 연락이 닿던 지인들과 안부를 교환했으며 미정인 사실을 누구도 알고 있지만 다음에 꼭 밥 한 번 먹자는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도 지루한 날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빨간 날들이 주르륵 몰려오기 전, 부서에서는 휴가 조사를 했었다.
"훈 씨, 이번에 휴가 안 쓰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다음에 계획한 날에 쓸 생각입니다."
조사하시는 연구원분은 휴가 정리를 마치시고 조금 놀라신 듯했다. 다들 기대하던 연휴일 텐데 휴가를 내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팀장님조차 휴가를 쓰라고 권유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한 달간 느껴온 부서의 분위기는 열기가 엄청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연구기관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안건에 대해서 뜨겁게 타오르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처음엔 생소했고 놀라웠으나 나누는 대화와 내용, 그리고 태도에 있어 소신 있고 진심을 다해서 그들이 업무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이끌어가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녹아들었는지 아니면 89일의 동기부여라는 제목처럼 혹여나 긴 휴일에 동기부여의 불씨가 훅하고 꺼져버릴 것 같아서인지 굳이 빈틈없이 빼곡히 채운 빨간 날들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부서의 절친은 나를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워낙 집에서의 생활을 사랑하는 친구였기에 충분히 그 마음도 이해가 갔다.
"도대체 왜 안 쓰는 거야? 붙여 쉬는 게 얼마나 좋은데."
"그냥 다음에 쓰려고. 지금은 아직 버틸만하거든. 나중에 조금 고되다 싶으면 그때 쓰지 뭐."
절친의 입장에서는 현재는 워낙 바쁜 시기였고, 휴가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으니 더욱 그럴 만도 했다.
휴가에 대한 나의 선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충분히 긴 휴일이 있는데 욕심을 부리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사람의 성격상 휴식이 길어지면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 그 기간 동안 확실한 계획과 실행할 수 있는 용기와 환경이 갖춰져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특히 더욱 게으른 성격을 가진 나는 항상 조심했어야 됐다.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동기부여에 더욱 많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자고 몰두하는 지금인데, 당장의 휴식에 눈멀어 나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을 항상 품고 있어도 72시간이 지나자 게으름이 찾아왔다. 약속이 있어도 곤란했고 없어도 문제였다. 이미 내 몸은 과한 여유에 더욱 입맛을 다셨다. 언제라도 빈둥거렸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렇다고 급한 마음에 흔들리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한 마리의 굼벵이가 탄생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원래의 계획 그대로를 이행했다. 약속이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친구를 만났고, 항상 다니던 운동도 빼먹지 않았다. 오히려 깊숙한 나 자신에게서 감시당하는 것 같아, 더욱 정진하려고 했다.
그리고 어느덧 길었던 연휴 또한 끝이 났다.
다시 출근하는 부서는 나에게 어떠한 기대감을 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 분위기, 출근 그 자체, 어떤 것 때문인지는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맞춰진 시간에 움직여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가 좋은 듯했다. 불과 몇 년 전의 내가 지금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함을 깨기에는 수많은 게으름에 잇따른 자기 비하와 우울감이 존재했다. 힘겨운 시간이었고 그것을 벗어나게 해 준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베풀어준 온정을 생각해서라도 펼쳐진 앞길에서 나는 절대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되었다.
정겨운 계단을 오르고 3층에 도달했다. 3층의 입구에서 반겨주는 소형의 연구 모형 전시들이 보였다. 그리고 기대감에 살짝 뿌린 긴장감을 맛보며 내 자리로의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