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89일의 동기부여 #08
최근 껍질 속의 열매는 쌕쌕 소리를 내며 앓았다. 관계적 측면에 지친 아이는 이전보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그러나 외피는 극명히 대비되는 시간들을 보냈다.
신년이 되어 업무 환경에 있어 새로워진 모든 것들에 적응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덧 입사한지도 두 달이 지나가고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항상 새로운 느낌이었다.
기존 정책에 있어서 보완하여 개편하는 일은 업무적 이해도가 상당해야 되는데, 얼떨결에 나도 한 부분을 맡게 되었다. 물론 실제적인 개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까지의 과정 중 하나를 맡은 것이었지만, 분량 자체가 상당했다. 이후에 입사하신 인턴분께도 인계해야 할 정도였다.
마음이 아무리 위태위태하다고 해도 일상을 져버릴 수는 없었다. 산더미 같은 크기를 보고서는 처음에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었다. 분량에 압도 당해 괜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이 어색해지는 듯했지만, 무리하더라도 결승선을 지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업무 분담이 이뤄진 이후로 기계처럼 일을 했다. 크게 기한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숨 돌리며 해도 됐었지만, 항상 열정을 쏟는 부서 분위기에 녹아들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의 나 자신에게 여유를 주기엔 무리가 컸다. 어떤 것에 몰두하지 않으면 또 환멸감에 살갗이 뜯길 게 뻔했다. 지금으로서는 일주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서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몰두할 수 있다는 것에 몹시 다행이라고 느꼈다.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억지로 모니터와 눈싸움을 계속했다. 목이 뻐근하고 손목이 시큰거리는 감각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고는 눈이 따가워질 때쯤 창 밖을 보니 해가 질 무렵이었다. 몸은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정신은 조금 맑아진 기분이었다. 내 업무 시간에 여유를 분배했다면 톱니는 금방 녹슬었을 것이다. 분명 일이고 정신이고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것이며 시침은 영영 나의 소망을 이뤄주지 않았을 테니까.
부스럭대는 과육들을 전부 파내야만 했다. 자존감의 언덕에서 언제든 탐스럽고 나를 웃게 해 주었지만 지금은 저 먼 접시에 담아두고 싶었다. 속껍질에 스크래치가 날 정도로 싹삭 긁어서 덜어두자고 마음먹었다. 마치 짠돌이 같이.
업무가 끝나면 항상 다니던 헬스장을 갔다. 근무 시간에 무리한 피로와 저녁 식사를 받아들인 내 몸은 안락을 극렬히 원했다. 신체의 안락은 자유로운 정신의 방목으로 이어진다. 더 자유로운 정신을 위해 수년을 고민했지만 지금은 모두 다 떠나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업무보다 더욱 좋아하고 몰두할 수 있는 것을 갈망했다.
휴식 시간이 많이 줄었다. 조금만 길어도 잡념이 퍼질 것 같아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몰입 자체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하기에도 어려웠다. 당일의 높은 만족감은 다음 날의 몰입에 지장을 줄 가능성이 컸다. 입맛을 다시며 짐 백을 주섬주섬 메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화려한 라벨의 위스키가 보였다. 외식이 어려운 상황에 집에서 소박하게 즐기자고 사둔 것이었다. 온몸을 식혀줄 것 같은 냉기에 덥석 집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 또한 과한 만족감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장 만족스러운 날을 그리워하고 그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냉장고를 닫는 와중에도 탐스럽게 찰랑이는 황금빛 물결이 보이는 듯했다.
한 가지를 극명히 외면하기 위한 나날들이 보인다. 나는 분명히 끊어내려고 해도 질기고 껌처럼 주욱 늘어나는 그것은 내 생각을 좀먹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생활이 그나마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리스크가 없는 여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나 부서지지 않을까 상처투성이의 껍질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당장 몰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며 내일 또한 무사한 하루가 되길 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