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잉 Nov 02. 2024

서울일기

김: 서울의 정치적 올바름이 미국의 political correctness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래리: 그 시작이 미국에 비해 40년 정도 늦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폭넓게 자리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말입니다.


김: 무엇이 안타깝습니까? 서울의 정치적 올바름이 미국에 비해 부족한 것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래리: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진보의 막바지에 등장하는 사상입니다. 물질적인 진보가 한계효용에 다다르고 사상적인 진보도 활로를 찾지 못할 때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입니다. 한국은 물질적 풍요와 민주주의를 이룬 후발주자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는데 그저 서양의 정치적 올바름을 답습하는 것을 보니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차별 없이 모든 인종과 직업이 평등하고 남성과 여성은 물론 게이와 트랜스젠더가 평등하며 인간 뿐 아니라 생태계 속 다양한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기라도 하단 말씀이십니까?


래리: 천지는 한없이 크니, 보약에 몸이 상하는 사람이 있고, 이치 또한 경우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좋은 것이라 한들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것이 좋을 수 있겠습니까?


김: 그러한 강요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던 것 아니겠습니까? 


래리: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강요가 언제나 좋은 결말을 가져왔던 것도 아니지요. 이상 사회를 만들려다가 엉뚱하게 수 백 만명을 아사로 내몬 캄보디아의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각자 자신이 믿는 이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치가 모두에게 통한다 생각하고 세상을 끼워맞추려 하거나 온통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미혹에 빠진 것이겠지요. 


김: 정치적 올바름이 무슨 피해를 가져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흑인을 차별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실 것 아닙니까.


래리: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흑인을 추켜세우면 그것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여성은 자연스럽게 사회 활동에 참여하면 됩니다. 커리어 우먼이 되고 연단에 올라가 정치인처럼 연설하라고 등을 떠밀 필요는 없습니다. 


김: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천천히 자리를 잡기를 기다리기보다 반대쪽으로 밀어서 균형을 잡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정치적 올바름이 편벽되었다고 해도 또 다른 편벽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편벽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래리: 정치적 올바름이 균형을 찾게 할지 또다른 편벽됨을 만들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겠습니다만 편벽됨 그 자체가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김: 그것은 흑인도, 여자도, 게이도 아닌 저희끼리 말하기는 쉽지 않겠군요.


래리: 정치적 올바름을 퍼지게 만드는 주요한 정서는 흑인의 고통이나 여성의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죄책감입니다. 노예제도와 남존여비 사상과 같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막연한 부채의식이 정치적 올바름을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도 동조하게 하고, 설령 과하거나 잘못됬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함부로 발언하지 못하게 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전범재판에 끌려가고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보며 다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전범재판에 끌려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소리치는 군중들도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기대감과 흥분 혹은 분노에 휩싸여 있을 뿐입니다. 


김: 하지만 그들은 다수에 기득권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손해를 보면서 억지로 끌려간다는 비유는 맞지 않는듯 합니다. 


래리: 다수이고 기성 권력에 더 가까운 것은 맞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력감이 팽배합니다. 주체적인 비전이 없습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을 때 다리 힘이 쓸모가 있는 것이지, 가고자 하는 곳이 없다면 아무리 힘이세도 그저 휩쓸리는대로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김: 그렇다면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전반적인 무력감이겠군요. 


래리: 그것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러한 팽배한 무력감의 정서가 젊은 층에 퍼진다는 것입니다. 무력감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나서지 않고 상황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회는 언제나 개선될 여지가 있고 유용하게 사용되지 못한 에너지는 엉뚱한 곳에서 폭발할 수 있습니다. 무력감은 사회를 개선 시킬 의지를 꺾고 에너지를 유용하게 사용할 여지를 없앱니다. 이러한 무력감이 사회 전체에 팽배할 때 사회는 정체되고 젊은 층은 욕구불만에 빠집니다. 


두 번째로 이러한 무력감은 지적인 활동을 통해 전파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의 지적인 활동의 첨단에는 정치적 올바름이 있습니다. 역사는 죄악으로 가득하고 당대에 위인이라고 불렸던 인물들의 절반은 비웃음거리나 악인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 역사를 공부하고 인문학을 접할수록 해서는 안 될 일들만 많아지고 무력감이 깊어지게 됩니다. 한마디로 배울수록 족쇄를 차게 되는 겁니다. 한국은 예로부터 독서를 즐겨해온 나라이고 요즘엔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보여주는 나라이니 세계 어느나라 부럽지 않게 많은 족쇄를 찰 수 있을 것입니다. 무력감에 빠진 지성인은 죄책감을 부추기는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메세지를 사회 전반에 전파하고 전직 대통령과 역사적 사건들을 비난과 비웃음으로 점철시키며 아무 비전을 제시하지 않게 됩니다. 


김: 정치적 올바름은 무력감을 보여주는 현상이고, 무력감은 에너지가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도록 하며, 이렇게 억눌린 에너지는 비합리적으로 분출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래리: 무력감이 수동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저출산과 사회활동 기피, 우울증 등의 현상이고 그것이 개인적으로 폭발하면 범죄가 되고 집단적으로 폭발하면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적 올바름의 선의나 그 지향점을 떠나서 정치적 올바름이 부상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사회가 제시하는 비전은 무력감을 부추기는 속 빈 강정이나 다름 없으니 사회적 통념이라는 틀을 깨고 스스로의 최선을 믿고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월, 금 연재
이전 09화 역사의 정반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