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발전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고 반대편에는 역사는 순환한다는 입장이 있다.
역사가 순환한다는 입장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역사가 발전한다고 보는 입장이 좀 더 보편적으로 호소력이 있다.
역사가 발전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발전이고 무엇이 퇴보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풍요와 안정, 안전과 자유, 평등과 행복 등으로 귀결될 것이다. 근대에 급부상한 또 다른 보편적인 기준으로는 경제적 성장, 기술적 진보, 인권의식의 향상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준들을 놓고 보았을 때 역사는 발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신이 태양신의 자손이라 믿는 인디언이 삶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다." 던가 "농업혁명으로 인간은 각종 질병과 사회적 구속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산업 혁명 이후 전례없는 과로를 경험하고 있다." 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퇴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가 퇴보한다는 사람들은 옛것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상 과제가 되었을 때 성공한 사례보다는 대차게 망한 사례들이 많이 떠오른다.
역사가 순환한다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퇴보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사람들은 때로 앞뒤 안가리고 갈아 엎으려 한다. 옛것의 단점만 보고 갈아 새 것으로 갈아 엎고난 뒤에야 옛것에 장점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다시 옛것의 장점만 가져올 수는 없다. 그냥 더 가속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진보에 일조하고자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러나 무엇을 기준으로 한 진보인지 알아야 하며 그 진보를 선택하고 옛 것을 뒤에 두고 옴으로서 잃게 될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선택을 한다면 미련을 좀 더 덜어놓고 진보할 수 있고 잃은 것과 그 잃은 것의 파급효과를 알고 있으니 다음 진보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끔 보면 진보에는 관성 같은 것이 있어서 더 이상 진보가 의미 없어질 때도 진보를 향해 치닫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물질적이거나 수치화되는 득실에는 민감하지만 정신적이고 수치로 파악되지 않는 득실에는 무감해지는 경향이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심이 섰는가?
변화하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내려놓을 것이 가졌던 장점은 무엇인가? 왜 그것은 지금까지 유지되었나?
변화의 선례가 있는가? 있다면 변화된 모습이 추구할만한 모습인가?
잠시 묵상을 해보자. 모든 판단 기준을 내려놓고. 지금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보자. 그리고 난 뒤에는 변화할 모습을 떠올려보자.
결심이 그대로 확고하다면 변화된 모습을 따라 살자. 이전의 모습을 고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되고자 하는 모습에만 집중하면 된다. 방향을 바꾸려면 가던 길을 막을게 아니라 몸을 아예 돌려버려야 한다.
이전의 것을 내려놓음으로서 따르는 어려움이 있을 때는 새로운 변화를 위해 스스로 감당하기로 선택한 일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인생은 적어도 3번의 변화, 많으면 서른 여섯 번의 변화가 있다는 옛말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역사나 인생이나 자체적인 기준에 따라 더 낫게 변화한다는 면에서 진보한다는 말도 맞지만, 변화가 반복된다는 면에서 순환한다는 말도 맞으며, 멀리서 보면 마치 예전에 이미 변화를 통해 내려놓았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변화도 있을테니 때로는 퇴보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입장에서는 언제나 진보할 뿐이다. 발전적인 목적을 가지고 변화하기를 선택할 뿐이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 그리고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혹은 '안 될 것 같으니까 하지 말자' 같은 태도는 현재를 사는 인간의 태도가 아니다. 정신을 500년 후 쯤의 역사가 혹은 무리들 틈에 숨으려는 초식동물에 의탁한 태도다. 현재를 사는 인간은 현재를 사는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전두엽과 묶인 예언자 혹은 학자 페르소나만 살거나 편도체와 묶인 초식동물의 감정만을 따라 살아선 안 되고, 전체적인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