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왕조와 제국은 언젠가는 멸망하고 사람들의 생활상도 끊임없이 변한다.
거기에 대한 이유는 보는 관점에 따라 수 없이 많은 것이 있을 것이지만, 나는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한 번 조망해보려고 한다.
역사는 사람들의 소망에 따라 흘러간다는 관점을 통해 보겠다는 것이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역사의 다음 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한 유럽인 선교사는 농민들을 보고 '마치 해탈한 것 같다. 아무런 욕망이 없고, 소박한 것들에 만족하며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각자의 권리를 신장시키려하며,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확장하고 종교인들도 포교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던 서양 사회의 시각으로 볼 때, 농사와 평온한 일상 외에 다른 일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농민은 마치 아무런 욕망이 없는 해탈한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욕망의 방향이 사유 재산을 더 늘리는 식으로, 경쟁적으로, 권력을 쫓는 식으로, 혹은 더 안락해지는 식으로 나아가지 않았을 뿐이다. 당연히 그것은 조선인의 본성이라기 보다는 문화적 배경의 영향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부자를 존경하기보다는 청빈을 존경했고, 권력을 얻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과거 시험이었는데 과거 시험은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도를 겨루는 시험으로서 자연스럽게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누구보다 유교적 가치관, 즉 보수적인 기존 질서를 강하게 체화한 사람들이 된다. 또한 안락을 경계하는 온갖 생활양식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방석은 손님이 왔을 때만 꺼내놓고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소파를 굳이 사놓고는 손님이 왔을 때만 그 위에 앉는 것처럼 얼핏 보기엔 이해가 가지 않는, 오로지 불편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런 생활 양식들이 많았다. 성욕에 대해서도 온갖 세세한 절제 양식이 있었음은 마찬가지다.
조선에는 권력욕과 소유욕, 성욕은 물론이고 남들과 다른 눈에 띄는 일을 하는 것, 편안한 것 모두를 스스로 절제하는 문화가 있었다.
사람의 주요한 욕망들이 없다는 듯이 살도록 하는 문화적 배경이 있고, 어느새 그것을 체화해 정말 욕망이 없어진듯이 사는 사람들을 보는 서양인의 입장에서는 '해탈했다' 고 생각할만도 하다.
그런 조선에서 허용되고 권장되는 소망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규정됐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 충효인의예지. 그리고 그러한 소망에 따라 자식은 부모의 뜻을 이어받아 부모가 살던 방식대로 살아가고 사적 영역을 벗어나는 일체의 일은 임금에게 일임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더 많은 금과 은을 원했고, 더 넓은 식민지 영토를 원했으며, 전쟁에서 이기길 원했다. 과학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길 원했고 과학 기술을 통해 자연적 요소들을 통제하길 원했다. 조선이 억누르던 기술과 상업에 대한 욕망을 서양에선 우대했다.
그러니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조선과 유럽 사이의 기술력과 경제력의 격차는, 조선인과 유럽인이 각기 무엇을 원했는가에 따라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이 끝나고 왕조가 완전히 무너지고 윗 세대가 남긴 모든 것들이 황폐화되자 충을 행할 곳도 효를 행할 곳도 없어져 버렸다. 그 공백을 '잘 살아보세'가 채웠고 역사는 그 소망에 부합해 유럽 선진국 못지 않은 생활 수준을 단기간에 이루어냈다.
그리고 유례 없이 풍족한 생활 수준을 누리면서 '잘 살아보세'가 와닿지 않는 소망이 되어버린 지금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갈까? 유럽의 선진국들도 경제적 성장과 안락이 예전만큼 와닿지 않게 된 것은 마찬가지이나 유럽에는 그 공백을 메워줄 대대로 내려오는 소망들이 있다. 유럽에는 예전 모습이 잘 보존된 고향에서 살면서 수 백년 역사를 가진 가업을 이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한국은 이씨왕조 500년간 이어지던 여러가지 소망들이 대부분 퇴색되었다는 점에서 더 큰 공허를 맞고 있는 듯하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공허함을 학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다루려는 시도가 많은 것에 비해 한국은 비교적 그런 움직임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한국인이 아직까지 '잘 살아보세'의 소망에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혹은 단지 그러한 공허감이 사회적인 담론이 되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경제적 풍요 속에서 느끼는 공허함의 크기는 한국인이 유럽인에게 뒤쳐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크게 체감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한국인이나 유럽인이나 몸에 상처가 났는데, 유럽인은 상처 부위를 보면서 나름대로 연고도 개발해보고 마인드 컨트롤도 하고 있는 반면 한국인은 더 큰 상처가 났음에도 어디에 무슨 상처가 난 줄도 잘 모르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함석헌은 한국인의 이러한 정신적 공백을 경계해 종교의 필요성을 말했다. 이승만도 20세기 초반 국제 사회에 뒤쳐진 조선을 보며 유교적 가치관이 퇴색될 것임을 알고 기독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금 기존의 종교가 갑작스럽게 그러한 공백의 대안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또, 이미 종교적 사회의 자리를 본격적으로 이성이 대체하기 시작한지 수 백년이 된 시점에 종교로의 회귀는 퇴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이성이 대체하지 못하는 종교의 역할은 꽤 크다. 그러나 규격화된 신앙을 이성 위에 두는 것의 폐해는 지난 수 세기간 충분히 증명되어 왔다. 내 생각엔 각자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혹은 필요한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사회는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최선을 다하는 것과 함께 중요한 점을 꼽자면 틀에 갇힌 소망을 갖지 않는 것으로 꼽고 싶다. 조선 시대의 인재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유교 경전을 외는데 최선을 다했고 어쩌면 농사 짓는데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조선 시대 사람들이 충분한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숙고해서 편견 없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면 적어도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유교 경전과 농사보다 더 나은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19세기 후반의 조선처럼 기존 가치관과는 다른 새로움이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시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틀에 박힌 소망만을 가지기 는 것보다 자신만의 소망을 숙고해보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되는 시대다. 좋은 소망을 가진다면 다른 사람들이 소망의 공백을 채우는 데에도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