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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Oct 09. 2024

왜 조선은 개화하지 못했을까

19세기부터 1945년까지 한국의 역사는 흑역사로 여겨진다.


유럽과 미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고 식민지를 확장하며 기세를 떨칠 때, 조선은 14세기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성리학 논쟁을 하고 청나라를 제외한 나라들을 오랑캐라 여기며 나라 문을 닫아왔다. 


심지어 바로 옆의 일본조차 급격하게 산업화되고 서양문물을 수용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지근한 대응을 이어가다가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넘겨줘버렸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비록 먼 과거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백제를 통해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했고,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비록 명의 도움이 있었긴 하지만 승전을 거뒀으며 임진왜란 이후 250년간 조선과 일본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만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1860년대 일본은 빠르게 개화해서 40년만에 유럽 국가들에 못지 않은 제국주의 국가가 된 반면, 조선은 그 시기에 실패한 내란만 몇 차례 지나갔을 뿐 역사의 중심에서 한참 뒤쳐져 있었다. 


나름대로 생각해 본 그 이유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일본이 조선보다 지리적으로 좀 더 서구 문명을 접하기 쉬운 여건에 있었고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인들과 교류가 있었다는 점 등의 외부적 요인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부적 요인을 한 번 조명해보고자 한다.



첫 째는 일본의 통치구조다. 조선은 이씨왕조를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체제 였다. 물론 일본도 에도 막부를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체제였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일본은 조선과 두 가지 점에서 달랐다. 우선 명목 뿐이긴 했으나 국가의 통치자로 여겨지는 덴노의 존재가 있었다는 점이 있고, 사쓰마와 조슈번처럼 여전히 에도 막부와는 사실상 별개의 통치 체제를 가지고 때에 따라 에도 막부를 위협할만한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이 있었다. 


이 두 가지는 메이지 유신의 핵심이 되었는데, 우선 200년 넘게 자리 잡아 개혁 의지와 능력이 퇴화된 에도 막부 대신 개혁을 일으킬 수 있는 일왕이라는 구심점이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개혁 의지를 가진 사람은 고종을 무시할 수가 없다. 고종이 아무리 말이 안통하고 겁이 많고 무능력해도 어쨌든 고종을 데리고 무언갈 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말이 안통하면 에도 막부는 제껴버리고 천황을 찾아가서 에도 막부를 갈아 엎을 명분을 얻을 수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조선은 썩은 통나무를 계속 끌고 다녀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일본은 썩은 나무는 버리고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전라도지사와 함경도지사가 손을 잡고 한양으로 진격해 나라를 뒤엎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애초에 모두 왕이 부여한 권력이고 선비나 포졸이 왕 대신 수령에게 충성하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지역 수령이 나라를 뒤엎을만한 권력 기반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역들은 애초에 자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사들의 충성도 에도 막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군을 향한 것이었다. 지역 권력들이 손을 잡고 중앙 권력을 타도할 기반이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메이지유신은 에도 막부를 제끼고 왕을 내세우고, 지역 권력들의 지지에 힘입어 일어날 수 있었다. 만약 김옥균이 전라도와 경상도지사를 설득해 중앙권력을 위협할만한 세력을 만들 수 있었고, 고종 대신 전권을 쥐고 나라를 이끌만한 사람을 찾아 내세울 수 있었다면 조선도 우물쭈물하다가 나라의 전권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은 충분히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서양 문물을 수용할만한 문화적 배경이 있었고 변화되는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개혁을 단행할만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위와 같은 차이점이 걸림돌이 되어 결국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라는 외부적 충격이 닥칠 때까지 자체적인 변화를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본다. 어떤 원칙이나 태도 혹은 유무형적 자산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은 필요에 맞게 변화할 수가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안정적일 수는 있으나 어느새 주변에 비해 뒤쳐지게 되고 끝까지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고통스러운 외부적 충격을 겪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유교 문화다. 유교 문화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사상인데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관련된 세세한 원칙을 만들어 사람들의 삶에 뿌리 깊게 자리잡도록 한다. 


유교문화가 잘못됐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교 문화의 속성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변화를 만드는 데에는 큰 걸림돌이 된다는 점은 짚을 필요가 있다. 조선이 대부분의 왕조의 평균 수명인 이삼백년을 넘어 500년간 장수할 수 있었던 원인도 이러한 유교 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또 일본이 수 백년 간 내전을 겪으며 닌자와 사무라이들이 활약할 동안 조선은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한 것에도 유교 문화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조금 단순하게 말하자면, 조선은 500년간의 안정을 대가로 변화에 뒤쳐졌다. 반면 일본은 잦은 내전이 있었으나 필요한 변화를 수용할 토대 또한 마련할 수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 또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본다. 기존의 구조에 순응해 갈등 없이 살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조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할 수 있는 역할도 그만큼 작아진다. 반대로 기존의 구조를 끊임없이 바꾸려고 하면 갈등이 이어진다. 그러나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는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둘 다 필연적인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에 매몰되지 않고 질서와 혼돈의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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