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고 둘째 딸이 피츠버그에서 친구 두 명을 달고 집에 왔다. 한번 집을 떠나면 그때부터는 손님이라더니 어찌 그리 딱 맞는 말인지 집 떠난 자식이 온다는 건 부모로서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은 잠깐이고 인내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다.
옛 부모는 자식과 함께 사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사회에서 발생된 수많은 고부갈등은 우리가 익히 들어와서 뭐 더할 말이 없을 정도로 시공을 초월한다. 당장 우리 엄마와 할머니의 기억을 잠깐만 떠올려도 할머니는 꼿꼿이 앉아계시고 엄마는 내 책인지 누구의 책인지를 연신 이곳에서 저곳으로 무의미한 옮기기를 반복하시면서 책의 무게만큼이나 무의미한 울분을 토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엄마는 20대 초반에 결혼하셨고 그 당시 할머니 나이는 겨우 50대 초반이셨다. 할머니가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했는데도 모든 걸 며느리에게 맡기시고 밖으로만 나가셨다고 한다. 속 고쟁이까지도 어린 며느리가 우물가에서 시린 손으로 빠셨다는 이야기를 귀 딱지가 앉게 말 하셨고 단 한 번도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시지 않으셨다며 어찌 그렇게 야속할 수가 있느냐며 소리소리 내셨지만, 할머니는 그 당시의 연세로는 89세로 돌아가셨고 우리 엄마는 70세에 이미 알츠하이머의 병으로 시달리시다가 80이 조금 넘으시고 돌아가셨다.
결국, 할머니는 50세부터 손에 물 한 방울 대지 않으시고 근 40년을 편하게 앉아서 며느리 밥을 받으시고 아들의 효도도 듬뿍 받으시고 건강하게 계시다가 정신도 멀쩡하신 채로 곱게 돌아가셨고, 우리 엄마는 근 50년을 공주님 같은 시어머니와 살아 계신 동안 당신의 어머니 편이셨던 남편과 줄줄이 다섯 자식을 키우시다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의 부모와 자식은 부모가 장성할 때까지 성장시키면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면 부모를 자식이 다시 돌보는 사이클이 극히 정상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부모는 내가 지금 생각하는 딱 성인이 되는 18살까지의 돌봄 즉 양육의 개념을 철저히 지켰다고 본다. 문제는 성인이 되었어도 독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이라는 공동체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자식은 아이를 낳아 어른이 되지만 부모는 갑자기 노인이 되는 과정에서 사회에서 절대적 경로사상을 자식에게 지나치게 요구해 그때의 자식 즉 우리 윗세대의 희생이 강요되었다.
나의 결혼생활 중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막내다 보니 자식 중 마지막으로 엄마 집을 떠나게 되었고 아이를 낳고 잠시 친정집으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남편과 내 직장이 친정집 가까이에 있었고 그때는 한창 아이 키우느라 생활비가 많이 나가던 때라 돈도 좀 아끼고 아이도 부모님께 맡길 마음이 있는터라 부모로서 막내의 생활에 보탬이 되어주시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이 있었더랬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된다였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어? 난 막내고 집에는 부모님 말고 아무도 기거하지 않고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친정집으로 들어간다면 누구든 팔 벌려 환영한다는데 단호한 엄마의 대답에 당장 남편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나보다도 먼저 남편이 제안한 친정살이였고 시댁과 함께 살았던 시절이라 내심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거에 나는 무안한 감사를 느끼고 있어서였는지 그 당시 엄마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그때의 거절이 평생 엄마의 사랑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 되었던 대목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내 딸은 나의 허락 없이 친구 두 명을 데리고 오는데 그것도 일주일씩이나 같이 있겠다는 통보를 했다. 나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니 일단 화가 났다. 엄마의 캐릭터는 항상 너희의 행복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라는 키치가 있었던 터라 쉽게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랬다면 아주 큰 오산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단 참았다가 나중에 말하는 성격도 되지못해 통보를 받은 즉시 목소리가 일단 높아졌다.
여기가 미국이고 아무리 네가 친구를 좋아한다 해도 여기는 엄연히 혼자 사는 집이 아닌 가족이 기거하는 곳으로 친구 둘을 데리고 일주일을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이 흐트러지는 것뿐만 아니라 중요한 건 친구들과 결정하기 전에 부모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했고 함께 살고 있는 동생의 의견도 물어보는 게 순서였다는 말을 분명히 했다.
어찌어찌 딸의 미안하다는 말과 감언이설로 딸과 친구 둘이 우리 집에 왔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다 큰 대학생들이라 아무리 부모지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일단 성인으로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거나 엄마 대신 동생을 잘 돌보고 있겠다거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잘 돌본다거나 아무튼 엄마가 없는 그 시간을 책임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공약이 무색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 여자 세 명이 추가된 집의 모양새란... 솔직히 나도 여자지만 남자의 깔끔함에 비해 여자들이 잘 치우지 못한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물론 우리 집만 그럴 수도 있지만 긴 머리카락으로 인해 그냥 걸어만 다녀도 머리카락 뭉치가 휘날려지고 그녀들이 앉은자리엔 왜 그리 과자 부스러기가 남는지 왜 강아지들은 그녀들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며 비비적거려 털이 엉켜버리는지 왜 내가 아끼는 실내화가 그토록 더럽혀 있는 건지...
일이 끝나고 학원에서 아들을 픽업하고 부리나케 집에 갔는데 어마!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여자 세 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방은 난장판이었다. 커다란 국 냄비 뚜껑은 열려있고 설거지는 그대로 쌓여있고 방에 가보니 옷들과 화장품이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고 중요한 휴대폰은 연속으로 받지 않고..
일단 막내 밥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는데 부아가 올랐다. 아니 친구까지 데리고 왔으면 최소한 지들이 먹은 설거지는 제때하고 나가야지 나가더라도 전화는 하고 저녁은 어떻게 할 건지 상의를 해야 하고 말없이 나가려면 방이라도 좀 치우고 나가던가 왜 강아지는 한 마리만 데리고 나간 거야? 별의별 이유를 다 붙여가며 화에 화를 더하고 있을 즈음 내 화난 뒷모습에 살기를 느꼈는지 슬그머니 아들이 누나에게 전화를 했나 보다.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며 할 말을 다 하고 나니 딸은 그런다. 친구들에게 화목한 우리 집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뿐이라고... 엄마를 화나게 하려고 하려는 건 아닌데 그때그때 말해주고 또 바로 용서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니 그제야 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해서 이해한다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걸 딸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래도 치우고는 나가야 했고 전화는 미리 했어야 했고... 어찌 말로다 설명할까?
미국에서는 'Empty Nest'라고 해서 한국말로 해도 같은 말인데 즉 '빈 둥지'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사회로 나가면서 그동안 북적거리고 시끌시끌했던 집이 한순간에 텅 비어버린 둥지가 되어버려 늙고 쓸쓸한 부모의 상징으로 한국과 거의 비슷한 정서적 느낌을 가지고 있다.
온갖 어려움을 뚫고 아기새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키워낸 어미 새가 아기의 날개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밀어내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가게 훈련을 시킨다고 한다. 내가 직접 목격한 바로는 엄마새 아빠 새의 공동육아로 엄마가 밖에서 먹이를 물고 있고 그 먹이를 먹으러 한 발 한 발 가지를 타고 나오는 걸 보았다.
흔히 이런 모습을 우리는 어미새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희망찬 독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어미는 가능하면 일찍 세상 밖으로 나가라 이끌고 아기새는 늦게 떠나려고 줄다리기하다 결국 타협하는 과정이고 완전한 훈련으로 내보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이는 큰 새나 뱀 등의 포식자가 아직 미숙한 새끼를 해치려는 비율이 높기에 그보다는 이른 비상을 요구하는 어미의 숨은 뜻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게 세상 밖으로 유인하고 나가면 새끼는 다시는 그 둥지로 돌아오지 못한다. 어미는 다시 그 둥지에서 알을 낳을 수는 있지만, 새끼는 이제 완전한 독립을 했기에 짝을 찾아 또 다른 둥지를 찾고 그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부모로서 자식을 열심히 키워낸 다음 아이들이 독립을 한다. 독립한 그 시점이 빈 둥지가 되어 외로움의 상징이 되었다지만 그때부터 부모도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우리는 몰랐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나를 잃어버린 채 새파란 청춘이 속절없이 가버린다. 물론 그 안에 녹아있는 희로애락의 많은 삶이 있었기에 들끊는 청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든 삶에 양면이 존재함은 불변의 법칙이니까
빈 둥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아이를 키우느라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싶은 게 뭐였는지조차 잊어버렸던 걸 기억해내고 이제는 주름진 중년의 나이가 되어 되돌릴 수 없는 청춘을 그나마 아이들의 장성한 모습으로 보답과 위안을 받고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지고 차 한잔이라도 마실라 치는데... 자식이 다시 둥지 안으로 들어온다?
나도 단연코 ‘안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의 엄마는 자식에게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렇게 참고 자식 뒷바라지가 완벽한 해답 인양 행동하는데 당신의 행동이 정당하지 못했음을 아마도 침묵으로 시인한 건 아니었을까? 서슬퍼런 시어머니를 몇십 년간 모시고 많은 자식을 모두 떠나보내고 아마 엄마는 그때 처음으로 엄마의 삶을 살고자 했을 것이다.
엄마가 자식을 거부하면서까지 당신의 가정을 지켜야만 했던 이유는 그제야 엄마 자신을 찾고 싶으셨던 것이다. 잘하시던 노래 교실도 다니시고 요리학원에도 다니시고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아빠와의 데이트를 일주일에 한 번 해야 하는 스케줄까지 잡았다는 말에 그저 피식 웃어버렸던 나의 얼굴이 지금은 죄책감으로 일그러진다. 그때의 나처럼 같이 산다는 것도 아니고 겨우 일주일 친구와 함께 잠시 기거한다는 말에도 이렇게 긴 글로 나를 표현하고 있으니 참으로 죄스럽다.
이제 막 피어나는 젊은 눈에 부모의 인생이 보인다는 건 내가 내 부모에게 그러했듯 어불성설이겠지만 자식의 새로운 인생과 엄마의 새로운 인생이 맞물려 버린 이 괴기한 시점에 엄마의 이기와 딸의 이기로 가득 찬 둥지가 되어버렸다. 오늘 드디어 둥지를 떠나는 딸에게 밝게 인사를 해줘야겠다. 웃으며 이렇게 "딸아, 나의 둥지에 너의 외로움을 채워줄 친구까지의 자리는 없으니 그리 알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