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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Oct 01. 2019

'영어권'과 '비영어권'

#04ㅣ부모와 아이의 이중 대화법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민 현실

"뭐 먹을래?" 엄마가 딸에게 묻는다.
"No. I don’t want to eat anything" 딸이 엄마에게 귀찮다는 듯 말한다.
"그래도 배고플 텐데 뭐라도 먹지?"
"Mom, Never!" 큰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대답 대신 혼잣말로 말한다.     

   

이 대화가 내가 처음 이민 와서 들어본 신기한 엄마와 딸의 대화법이었다. 엄마는 한국말로 묻고 아이는 영어로 대답하고 한마디로 이중언어의 대화로 주고받기를 하는데 얼마나 기이한 행동인가? 이런 대화법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 짧은 단답형뿐만 아니라 긴 대화도 이중 대화법으로 가능하다니 난 도대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고 자세히 보니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 대부분 이중 언어 대화법을 하는 가정이 놀랍게도 많았다.

  

일단 부부가 높은 학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민을 오면 누구나 언어장벽에 부딪힌다.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을 나오고도 (물론 전체를 말하는 건 아니다)마트의 허드렛일을 하고 신문을 나르고 세탁소에서 뒷일을 한다. 여자는 식당 웨이추리스나 주방일을 하고 델리 주방에서 샌드위치를 싼다. 한국보다 육체노동의 시간당 버는 비용은 높지만, 미국은 전세 개념이 없어서 매달 내야 하는 렌트비의 비중이 크다 보니 부부가 함께 매일 12시간씩 일을 해도 렌트비와 의료보험비, 차보험료 등을 내면 빠듯한 살림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한 주 벌어 렌트비 내고 한 주 벌어 보험료 내고 또 한 주 벌어... 이러다 보니 정작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이민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대화를 하지 못하다 보니 이중언어의 대화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한 번은 한의원에서 침을 맞기 위해 대기실에 있는데 한국 어른 남자가 들어와서는 처음이라며 진료 카드를 작성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나에게 물었다. 내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랬는지 난 그 남자가 너무도 이상하게 보였다. 분명 한국 사람 얼굴이고 한국말을 어눌하게나마 하긴 하는데 한글을 전혀 모르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 한글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터인데 그때는 왜 한글을 모르지?라는 의구심만 가득했다. 같은 한국 사람도 이런 생각을 가지는데 노랑머리 미국인이 볼 때는 어떨까?

  한국 얼굴로 한글을 모르면 정체성의 한계에 부딪힐 가망성이 크다

 

그 기이한지만 어쩔 수 없는 비애를 보고서 단 3년 동안만의 미국 생활을 생각한 2003년도엔 큰아이는 7살에 왔으니까 한글은 이미 알고 미국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영어는 금방 습득할 것이고 문제는 두 살 된 어린 딸에게 한글이 영어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한국 얼굴을 한 한국 사람이 한글도 모르고 영어를 먼저 배우는 건 나중에 정체성의 한계에 부딪힐 가망성이 높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의원의 그 남자 어른처럼...

   

큰아이가 한글 공부를 했던 한글 파닉스 카드를 이용해서 간단한 단어를 먼저 습득하고 단답형의 문장형태로 읽을 수 있게 했다. 쓰기보단 읽기에 중점을 두고 어디에서든 물어보고 읽게 하고 또 반복했다. 매일 밤 한국 동화책을 몇 권 읽어줄지를 아이와 정하고 적어도 3권 이상씩을 읽어주었다. 한국에서 짐을 포장할 때는 책이 얼마나 무거운지 후회도 조금 했었는데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몰랐다. 특히 셋째 임신을 했을 때는 태아를 위한 태교에도 좋을 거 같아 더욱 한글 동화책 읽기에 매달렸다.

   


그래서인지 그 뒤로도 책 읽는 걸 너무 좋아해서 도서관에서 매주 30권씩을 빌려다 주면 넙죽넙죽 잘도 받아 읽더니 나중엔 도서관에 있는 동화책은 거의 다 읽어버려 더 이상 빌릴 책이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고등학교 때에 당장 기말고사가 다가와도 그 두꺼운 책을 끼고 있어서 내가 불안해할 정도였다.

   

그러다 한계에 부딪힌 일이 왔다. 미국에 도착한 1년 뒤쯤 일주일에 3일, 5시간씩 데이케어 (어린이집)에 맡기게 되었다. 난 '3년 안에 영어 마스터하기'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엄청난 목표였지만 그때는 그렇게되리라 상상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아이를 어딘가에 맡겨야 했다. 만 4살 전에 다녀야 하는 데이케어는 상상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만 했고 비용을 생각해 정말 열심히 시간을 쪼개가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데이케어에 맡긴 지 한 6개월이 흘렀을 즈음 부랴부랴 아이를 픽업하려는 나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당신 딸 혹시 말을 전혀 못 하나요?" 라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 너무 놀라 말문이, 그렇지 않아도 영어가 힘든데 말문이 막혔다.
"말은 알아듣는 거 같은데 한 번도 아이들이나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아요" 내가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가?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가슴이 먹먹했다. 난 겨우 미국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의 영어를 사용하던 차에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말을 저리 재잘재잘 잘하는 아이가 미국 어린이집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 하는 아이였구나! 그동안 얼마나 많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을까? 얼마나 혼자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훔쳐야 했다. 한글이 먼저가 아니라 미국에 살려면 영어가 먼저였구나 라는 후회막급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영어 한마디 못하는 아이가 만 5살이 되면 킨더가든(유치원)에 입학해야 하기에 우린 교육청에 가서 영어 테스트를 해야 했다. 그때는 영주권이 없고 취업비자(남편은 H1 우리는 동반비자 H4)이기 때문에 학교에 직접 초등학교에 원서를 접수시키지 못하고 일단 교육청에서 영어 테스트를 하고 만약 영어에 익숙하지 못하면 Esol(영어에 미숙한 이민자를 위한 반) 클래스에 들어가야 한다. 테스트 결과 Esol 클래스에 들어가기엔 조금 아까운 결과이니 입학전에 영어 학원에 보내서 기초 영어책 정도는 읽을 수 있게 하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다행히 Gumon (인도에서 창립된 학원)에서 알파벳과 간단한 수 개념을 익히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셋째의 출산으로 두 달 만에 라이드를 할 수 없으니 그만두어야 했다. 그 뒤론 갓난아이를 데리고 매일 한국 동화책이 아닌 영어 동화책을 나의 이상한 엉터리 발음으로 읽어주어야 했고 그나마 큰아이의 어설픈 영어로 도움을 받아야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입학을 한 꼭 한 달 후에 Esol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순간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에 담담해졌다. 그러나,


"상의 드릴 게 있는데요" 내 심장이 콩알만 해졌다. 좀 더 영어를 시킬 걸...
"네, 말씀하세요" 그래도 책은 열심히 읽어 주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아이를 월반시켜야 한다고 하시는데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해요" 어라?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월반이라니...     

   

그때까지 난 한 번도 월반에 대해 이곳 사람들에게 들어본 적도 없고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인데? 결국, 학교로부터 편지로 통보를 받고 7명의 어른이 한자리에 모였다. 교장을 비롯해 카운슬러, Esol 선생님, 킨더가든 담임, 월반할 반 1학년 담임 선생님, 1학년 수학 선생님 그리고 나까지 한 아이의 월반을 위해 이 많은 선생님이 모였다. 아이의 한 달 동안 꼼꼼하게 메긴 성적표를 담임이 브리핑하고 교장이나 카운슬러의 생각들과 월반할 선생님의 동의를 받고 마지막으로 나의 동의를 묻기에 나는 되물었다.     


"일단 우리 아이가 1학년 수준이라는 건 알겠는데 학교생활을 하는데 성적만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키도 다른 아이보다 작고 몸집도 작고 무엇보다 한국 아이라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어떡하죠?" 자못 데이케어의 악몽이 떠올라서 물은 말이다.
"맞아요. 성적만 가지고 월반할 수는 없어요. 한 달 동안 아이는 저의 어시스트였고 친구들 사이에선 리더였어요. 친구들과의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일단 안심이다. 또 물었다.
"만약 월반해서 다른 아이들과 적응하지 못하면 다시, 킨더에 들어갈 수는 있나요? "
"당연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가 만약 월반을 시키지 않는다면 부모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강한 어조였다.

   


이렇게 해서 다른 또래에 비교해서 키도 몸도 작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한국 아이가 6개월 동안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만 해서 한글보다는 영어를 먼저 해야 했다는 엄마로서의 자괴감을, 그렇게도 먹먹했던 내 가슴을 한 방에 날려버린 순간으로 당당히 영어권으로 입성했다. 하지만 월반을 한 1학년 반에는 한국 아이가 10명이나 있었고 모두 여기에서 태어난 똘똘한 아이들로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는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해야 했다. 거의 한 달 꼬박 우리 아이는 매일 울며 학교를 갔고 급기야 1년 뒤에는 전학이라는 강행군을 했던 무언의 이유가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되는 것들이 이런 것이지 싶다. 

   



누가 나에게 월반을 해서 좋았나요?를 묻는다면 난 당연히 NO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는 나이의 제한이 학년의 제한보다 우선이기 때문에 우리 아이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제법 많았다. 인턴을 해야 하는데도 나이 제한에 걸려 친구들보다 늦게 할 수밖에 없었고, 운전면허를 따는 것도 나이 제한(15살 9개월)에 걸려 친구들보다 느리게 접수를 해야 해서 때를 놓쳐 버리고, 동물 보호소에서 봉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월반을 해서 좋은 혜택은 하나도 없는 거 같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아무튼, 둘째의 영어보다 한글 먼저가 통한 경험으로 막내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어 둘째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한글을 먼저 읽혔다. 티브이 채널도 한국방송을 추가하고 뉴스는 매일 한국과 실시간으로 보고 듣게 하고 주말에는 스토리가 연결되는 한국 가족 주말 드라마를 한편 선정해서 가족 모두 같이 즐겨 보았다. 한국 드라마는 여기에서도 인기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이들과( 막내가 좀 서툴지만) 한국말로 대화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고 모두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대신 나의 영어 실력은 늘을 턱이 없지만 내가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데엔 한계가 있고 아이들이 나에게 한국말을 하는 게 빠르지 않은가? 내가 좀 못하면 어떤가? 아이들의 이중언어가 나의 비영어권보다 나쁠 리 없다. 하지만 오늘도 서글프다.

‘영어를 아이들처럼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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