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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마이애미에서 딸이 날아왔다. 처음엔 나의 생일 때문에 멀리서 오는 착한 효녀라 생각했다. 남자 친구도 같이 식사를 한다기에 아침부터 마음이 바빴다. 하지만 딸은 딱 2시간의 시간만을 우리 가족에게 할애하고 남자 친구의 차를 타고 다시 날아가 버렸다. 우리 앞에서 스킨십하는 모양이 영 못마땅한 남편은 나에게 살짝살짝 얼굴을 찡그린다. 남자 친구는 엄마와 딸의 제스처가 같아 헛갈릴 정도로 똑같은 행동을 한다며 의아해하며, 웃는 얼굴도 같고 웃을 때 입을 쭉 내미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같다며 연신 나와 자기의 애인 얼굴을 번갈아 보며 머리를 갸우뚱거린다. 순간 나의 연애 시절이 오버랩되었다.
우리 때는 모두가 비밀연애를 했다. 친구들에게도 드러내지 못했고 여러 달 만난 뒤에나 비밀 얘기하듯 털어놓는 진득한 구석이 있었다. 당연히 부모님에게는 '정말 이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뒤에나 인사를 시킬 수 있었다. 남자를 만난다는 게 무슨 죄인인 양 철저히 속여야 했고 행여 들킬세라 남자가 아닌 여자 친구로 탈바꿈시키고 회사 동료로 둔갑시켜 만나야 했다. 요즘처럼 공개연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속칭 잘 나가는 연예인도 아닌데 말이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찰나, 마지막 노선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면 가장 멋지게, 가장 순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최대한 다소곳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하물며 어디 부모님 앞에서 스킨십을...
왜 그렇게 그때나 지금이나 ‘사’ 자 들어가는 사윗감을 좋아하는지 ‘사’ 자가 아니면 비밀연애는 더욱 단단한 철통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사랑을 확인하기도 전에 도루 아미타불이 될 게 뻔하기 때문에 서로의 믿음이 확실하기까지 최대한 끝까지 부모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둘만의 사랑만 키우다 보니 사람들과의 사회성이나 집안의 내력, 가정환경 이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수밖에...
이제 내가 나이가 들어 내 아이들이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되다 보니 무엇보다 사람의 됨됨이가 제일 중요하고 그 인성은 결국 부모님의 교육에서 비롯됨을 알고 나니, 우리 때처럼 비밀연애를 하면 도리어 부모가 아이의 상대방에 대해 인성을 볼 시간도 없이, 둘이서 사랑만을 확인하고 사고 칠게 뻔하니 난 아이들의 남자 친구가 생기면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알기를 원했다. 오죽하면 딸은 징크스가 생겼다고 한다. 엄마한테 말하면 바로 깨진다고... 이번에는 좀 오래가려나 모르겠다.
나는 감정선이 메마른 축에 속한다. 그냥 그냥 내가 나 아닌 듯 살아서인지 아주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도 하다못해 명품이라는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아도 크게 감동적이지 않으니 참 재미없는 철학을 끼고 사나 보다. 우리 아이들도 말은 안 하지만 그런 강인해 (?) 보이는 엄마가 내심 밋밋했었는지 큰아이가 생일 선물을 내밀며,
“엄마, 이 선물을 받으면 눈물을 흘릴 거야”
“흠... 엄마의 눈물은 좀 비싼데?”
“친구들이랑 내기했어. 엄마가 눈물을 흘리는지, 안 흘리는지”
“에구 어쩌지? 눈물이 나야 되는 거지?”
하며 웃었다. 그리고 선물을 풀었다. 사각으로 긴 액자였다. 액자 안에 내가 있다. 내 옆에 또 다른 내가 있는데 내가 아닌 나를 꼭 닮은 나... 딸은 지금의 자기 나이와 엄마의 나이가 같은, 나의 젊은 대학 때 사진을 몰래 가져다가 사진 속의 머리 모양이며 옷들을 구해서 똑같은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비슷한 분위기의 장소를 찾아 사진을 잘 찍는 친구와 함께 나의 사진 속 모습 그대로를 연출해서 쌍둥이처럼 찍어 액자를 만들어 온 것이다. 한 컷도 아니고 여러 컷의 사진을 찍느라 머리 모양도 다르게 해야 했을 거고, 옷도 발품을 팔아 구해야 했을 거고,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지어야 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진들을 찍어야 했을까? 그러니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 모습에 동참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난 눈물을 흘렸다.
순수함이라 하면 촌스러움의 대명사
나의 그 시절... 그러니까 대학교 때의 내 모습은 순수했다. 순수라고 하면 긴 생머리에, 하얀 화장기 없는 얼굴에, 파스텔톤 원피스에, 다소곳한 표정과 말투 정도? 남자들의 로망이라던가? 긴 생머리가... 그런 순수는 최소한 아니고 나름 미대 출신이라 그런 순수함은 약간 촌스러움의 대명사쯤으로 여기고 내 모습은 그런 '강수지 외모'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설계도를 그리다 제도판의 뾰족한 부분에 허벅지 근처 청바지가 찢어졌다. 꿰맬 수도 없고 그대로 데이트를 갔는데 차마 못 보겠다며 곧장 그 근처의 옷가게로 끌려가 극히 정상적인 청바지를 구입해 준 이도 있다. 팬티가 보일랑 말랑 찢어진 청바지를 ‘찢청’이라 불리며 누가 더 많이 찢어지고 헤어졌나 시합하듯 찢어지지 않으면 청바지 축에도 들지 못하는 요즘 시대에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우는 답답한 시절을 산 구시대 얘기다.
갑자기 나의 까맣고 까만 머리에 싫증이 났었나 보다. 정말 앞머리 한 가닥을 하얀색으로 염색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염색이라 해봤자 맥주로 머리를 감으면 살짝 맥주 색처럼 검정의 머리 색은 날아가고 갈색 정도가 나오는 게 다였던, 염색약이 발달되기 전이라 나의 흰머리는 매우 획기적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해 약간의 다름에 우쭐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어떤 이의 손에 이끌려 다시 원상복구로 하얀색이 검정으로 교체되었다. 난 조금 다름이 좋은데... 그때는 그랬다. 획일화된 사회에서 남들과 다름이 엉뚱하고 이상하다는 고정관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몇 해 뒤에 나온 말이 난 참 좋았다.
개성시대라는 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서태지를 기점으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림이 확실해지고 개성의 봇물이 터지기 시작했고 어떻게 그런 끼들을 숨기고 살았나 싶게 너도나도 가지고 있었던 특이함이 튀어나오면서 누가 더 많은 개성이 있나를 앞다퉈 표현하였다. 아마 그때부터 음악에서부터 예술 전반에 걸쳐 변화의 급물쌀을 타기 시작했고 신조어도 동참되어 나는 X세대로 불렸고, 386세대니하며 지금은 Z세대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내가 아는 신조어만 해도 미시, 꽃중남,... 요즘엔 ‘섹시하다’라는 말을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은 아름다움으로 급상승되어 누구나 로망 하는 단어가 되었지만, 그때는 섹시라는 말은 플레이보이 잡지에서나 나옴직한, 음흉한 사내들의 음담패설쯤으로 여기는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금기어였다는 걸 알려나 모르겠다.
지금은 공장에서 인형 나오듯 똑같은 예쁜 인형들이 성형외과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절이라 오히려 예쁜 얼굴이 아닌 자연미인을 찾아보기 어렵고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자연미인이 매력적인 얼굴로 급부상하고 있다. 패션의 복고 열풍과 함께 얼굴도 복고라니 아이러니하다.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자가 개성시대에는 정답이 되었다. 시대에 따라 얼굴의 기준도 달라짐을 내가 사는 시대에 볼 수 있어 난 행운이다. 순수를 이야기하다 섹시로 넘어가니 너무 나갔다.
난 암튼 미대생답게 치장에 열중했고 다분히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학생이었지만 마음은 순수했다. 지금의 내 딸처럼... 사랑 지상주의를 마음에 담고 남자의 학벌이나 외모, 가정환경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서로의 굳건한 사랑만이 존재하는 듯 치열하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확신이 섰다. 부모님께 알려야 할 시간이 되었음은 비밀연애의 종지부를 찍어야 함이다. 나의 사랑이 너무 확고했기에 동성동본이라는 사실도 묵인해줄 정도로 부모님은 나에게 손을 드셨다.
친구들은 ‘어떻게 영업사원과 결혼을 하니?’ 라며 핀잔 아닌 조롱을 했지만 난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너희들이 사랑을 알아? 진정한 사랑은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야. 내면이 중요한 거야 바보들!’ 그렇게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 스타트를 끊었고, 그렇게 나에게 말했던 친구들은 모두 ‘사’ 자가 들어가는 1순위 신랑감들과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그 친구들은 모두 잘살고 있겠지? 지금은 친구 대신 딸이 내게 묻는다.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어?'
'왜 결혼하고 싶어 지니?'
'아니... 결혼을 하면 50년 정도는 함께 살아야 하는데 엄마는 결정하는데 무섭지 않았어?'
'음... 서로 헤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보내기 싫고, 바래다주는 게 귀찮아지면 같이 살아야 되는 거야.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하지 말래도 결혼한다 할 거야. 기다려봐'
내 딸의 지금의 남자 친구는 미국 사람이다. 내가 한국에 살았다면 인종이 다름에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대사건이겠지만 여기는 미국이고 미국 사람을 남자 친구로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하는 게 적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부모 중 많은 사람들이 같은 한국 사람을 배우자로 맞길 원한다.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말하는 사람들의 예는 차고 넘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언어의 장벽인 거 같다. 물론 둘이야 잘 통하겠지만 자식과 부모와의 언어 소통에는 큰 장애가 아닐 수 없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말로 문제가 발생되는 고부간의 갈등이 많아 오히려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자잘한 문제는 없다 해도 깊이가 느껴지지 않아 마냥 손님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다고들 한다.
예로부터 사위 사랑은 장모이고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맞는 말인 게 난 딸의 남자 친구가 참 좋다. 유머러스하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스킨십에 남편은 눈살은 찌푸리지만 난 내 딸을 이뻐해 주니 그저 좋아 보인다. 우리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오면 내가 눈을 찡긋거리며 싫다는 표정을 지으려나 그건 당해봐야 알 일이다.
딸이 이젠 커서 부모의 그늘보다는 남자 친구의 보호 받음이 좋은가보다. 나 또한 그 나이에 그랬었고 지금 시대는 그때보다 모든 게 더 빠르게 돌아가니 당연하다. 남편은 딸을 키워보니 나도 우리 부모의 딸이었던걸 상기하나 보다. 누구보다도 귀하고 정성껏 보살피고 이뻐한 딸이 막상 남자 친구가 생기고, 아빠보다 더 의지하고 좋아하는 모습에 질투가 나나 보다. 우리 딸을 저리 좋아하는 모습에 눈살을 찡그리는 걸 보면 말이다.
같은 남자끼리 더 잘 알 텐데... 자기는 우리 부모님께 더 예의가 없었으면서... 그래서 남자는 자기 딸을 키워 봐야 아내의 소중함을 안다고 했나 보다. 섭섭함이 질투로 느껴져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아보려고 하는 듯 보여 나는 또 속으로 웃어 죽는다. 나 또한 그런 때가 있었음에 감사한다. 이제는 가족이 되어 그때의 떨림이나 설렘이 사라져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옆 사람으로 남아있음이 서글퍼지지만 그때의 황홀했던 느낌이 내 딸을 통해 그대로 느껴져 옛 추억을 잠시나마 그려보는 밤이다. 헤어지기 싫었었는데... 저렇게 코를 골고 자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