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랜Jina Aug 19. 2022

크롭티, 뭐가 문제죠?

미국에 도착하고 많이 놀랐던 일 중 하나가 여자들의 자유로운 옷차림이었다. 튀는 것보다는 묻히는 걸 선호하는 사상이 짙었던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35여 년을 살아서인지 흔히 말하는 무채색이 시크함의 대명사로 검은색 계열의 색도 아닌 눈에 띄지 않는 색에 단정한 옷차림이 정답인 줄 알았다. 그러다 미국의 알록달록한 형형색색의 색과 이색적인 디자인 자체에 흥미롭다기보다는 과감한 문화의 차이로 일단 큰 심호흡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논란이 되다 유행이 되어버린 레깅스는 20여 년 전부터 미국에선 누구나 즐겨 입었는데 지금처럼 디자인이 화려하진 않았더라도 몸에 쫙 달라붙는 타이즈 형태인 레깅스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입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옷이었다. 특히 하체가 튼튼한 여성들이 정.말.로 누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익숙함이라는 것이 그렇다.     


미국에서 처음 그런 모습을 본 남편 하는 말이 '여기 사람들은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사람들인 거 같아'라고 말할 정도로 민망함을 넘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커다란 몸이 천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몸의 형체가 그대로 보이고, 살색 레깅을 입어서 살인지 옷인지 구분이 안 되기도 하고, 레깅의 문양이 타투처럼 되어 있어서 온몸이 타투로 도배되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그야말로 자신 이외의 타인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걸 봐와서인지 점점 그들의 옷차림에 나 또한, 개의치 않고 익숙함으로 묻히고 있는중이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 복장에 관한 엄격함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스파게티 나시(두꺼운 줄이 아닌 스파게티처럼 가느다란 줄 하나가 달린 민소매)나 스파게티 원피스는 입지 말라는 경고를 날린다. 레깅스에 관한 조항은 내려지진 않았지만 어떤 주에선 레깅스에 대한 금지 사항이 있다고는 들었다. 옷 규제가 있는 거에 반해 어릴 때부터 화장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다. 그래서 짙은 화장에 커다란 액세서리를 하고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면 '여기가 정말 미국이구나'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 쳐도 우리 아이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익숙함 속에 나의 딸들까지 포함 시키지는 못했다. 늦잠 꾸러기들이라 스쿨버스도 제시간에 타기 어려운 탓에 감히 이른 일찍부터 화장을 하는 부지런함은 갖지 못해 엄마인 나로서는 천만다행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엔 엉덩이가 거의 보이는 짧은 반바지를 입는다거나 찰싹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고 다니는 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아직은 엄마의 교육 아래 부모의 간섭을 받아도 된다는 논리로 뜯어말렸기에 최소한 내가 보는 앞에선 몸의 굴곡이 그대로 노출되는 레깅스를 입진 않았다. 모르지.. 엄마만 모르게 학교에서 갈아입었을지는...     


그런데 이제는 크롭이다.     


점점 옷이 짧아진다 했다.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패션 스타일이 조금은 불안했다. 허리를 강조하면서 제멋대로 방대하게 커져 버린 통바지가 그 끝을 모르고 있었다. 바지가 하루가 다르게 커지면서 복고풍으로 거리를 쓸고 다니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는 동안 다행인지 불행인지 셔츠의 길이는 전과 다르게 짧고 딱 달라붙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허리를 기준으로 아래로는 더 크고 더 넓게, 위로는 더 짧고 더 타이트하게 변모하는 과정에 크롭티가 빠르게 유행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유행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레깅스가 허리 아래를 강조한다면 크롭은 허리 위를 강조하는 것인데 허리 아래를 강조하는 건 위험한 일이 많다. 거의 모든 여자의 고민인 허리둘레를 드러내야 하고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여자의 3/2를 노출해야만 하는 것에 반해 크롭은 허리 윗부분이라 가슴과 배꼽 윗부분만 노출되는 옷이니 그리 위험하진 않다고 본다.      


복장의 형태는 시대와 문화의 상황에 기인한다.     


크롭은 우리의 한복의 저고리에서 기인 된 것일 수도 있고, 비키니 수영복에서 발전된 것일 수도 있고, 유럽의 기원전 이전의 옷에서도 얼핏 본 적 있는 형태에서 발전되었을 수도 있다. 저고리도 유행이 있어서 짧아지면서 섹시미를 강조한 기생 한복 같다는 반열에 올랐다가도 반대로 밑으로 길어지면서 치마는 짧아져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개량 한복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한번 상의가 짧아지니 티셔츠나 블라우스, 남방이 이르기까지 모든 옷의 전반에 걸쳐 이제는 길이가 긴 옷은 올드패션이 되어버렸다. 오피스룩의 대명사인 쟈켓마저 짧아지면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입어야 했던 정장패션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그러니 크롭의 대세가 꺾일 리 만무하다. 문제는 자꾸 짧아져 브라가 그대로 노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얼마 전에 브라를 하지 않고 티셔츠만 입고 사진을 찍은 바람에 사회적 지탄을 심히 받다 결국 자살로 마감한 스타가 있었다. 그 일과 연관되어 그녀의 사생활까지 영향을 미쳐 심한 정신적인 충격과 보이지 않는 악성 댓글로 상처를 입은 후의 죽음이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그로 인해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미국까지 전해져 왔었다.     


여자의 가슴이 직접 노출된 것도 아닌 유두의 간접 노출에도 이렇게 이슈화 된다는 거 자체에 같은 여자로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가슴에서 분비물이 나와 팬티처럼 반드시 입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가슴이 변형되는 것이 싫다거나 옷의 맵시를 위해 입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눈을 위해 눈가리개용으로 브라를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지만 브라를 하지 않아도 이상할 거 없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약속으로, 그리고 익숙함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다.     


시대를 앞서 나아가는 리더의 행동은,      


뒷짐 지며 시대를 옮겨 타는 사람에게는 익숙해지기 이전의 새로운 행동이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률적인 사고 이전의 행동이라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처럼 인류의 재탄생을 위한 업적으로 큰 박수를 받는 리더도 있지만, 마돈나나 레이디 가가와 같은 파격적인 행보를 걷는 뮤지션은 호된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이슈로 내몰린 후의 상황은 의외로 빠르게 익숙해지며 독특함은 사라지고 오히려 이전의 행동이 고루하게 보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많다. 브라를 하지 않고 대중에게 나선 그녀처럼 말이다.     


한평생 입을 줄만 알았던 교복에서 자율복장 선언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정책이었다. 하지만 옷으로 판가름 나는 빈부격차의 판도라가 열린 셈이었고 친구 사이의 괴리감이 얼마나 커져가고 있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이키나 필라 같은 브랜드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며 패션업계에 호황을 불러일으켰다.


그때부터가 대한민국이 컬러나 패션에 눈을 뜬 시작점이니,     


아직도 한국은 완전한 자유를 찾기에는 자유 복장에서 벗어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더구나 개인보다는 다수의 의견과 다수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예의고 메너라고 배워왔던 유교 사상이 남아있다. 그런 탓에 집단 안에서 누구의 눈에 뜨인다는 건 '입는 건 너의 자유지만, 그로 인한 사회적 시선은 네가 감당해야 하고 전적으로 너의 잘못이다'라는 집단주의적인 시각으로 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선 개인주의적인 비난으로 연결된다. 두 얼굴을 가진 집단 사고의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미국은 개인적인 시각으로 개성을 존중하고 타인에 대한 시선을 극히 차단하는 사회적 문화가 지배적이라 남의 행동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은 그것이 타인을 위한 존중이라고 교육한다. 자칫 나만 아니면 되지라는 개인적 사고에 함축되어 집단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고립된 개인주의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개인적인 주관을 적극적으로 배려하고 타인의 행동에 관여하는 건 메너가 아니라는 시선이 모든 국민을 개인의 자유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힘을 생기게 만든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내가 입고 싶은 데로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익숙해진 문화와 역사의 차이고 보는 관점에 따른 다른 시각의 차이라고 봐야 한다. 크롭티를 입고 출근을 하든 레깅스를 입고 학교를 가든 모든 일은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 개성대로 자유롭게 입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뒷받침에는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왜? 가 아닌 나와는 상관없다는 무신경이 때로는 정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크롭을 입고 국회로 출근을 하면 문제가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행동을 하면 질책의 대상이 된다는 것쯤은 성숙한 성인이라면 알 수 있다. 같은 크롭이라도 너무 짧지 않은 길이로 입고 하이 웨이스트 바지를 코디해 배 부분이 보이지 않게 입는다면 패션의 적정선과 상식적인 메너,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크롭티, 도전해 보자!

이전 08화 ‘핑크 헤어롤’이 뭐길래 뉴욕 타임즈에 실리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