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캠프에 들어가고 남은 둘째 아이 또한 CTY에 도전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캠프 참여가 가능한데 2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SAT가 아닌 SSAT라는 시험을 봐야 한다. 지금은 더욱 다양한 시험으로 합격여부를 알 수 있다. 둘째는 2학년 때 시험을 보았고 수학에서 뛰어난 점수를 받아 어워드를 받았다. 6학년부터는 기숙사 생활이 가능하지만 저학년은 데이 스쿨이라 해서 집에서 출퇴근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과를 보지 못했다. 역시 뛰어난 아이들과 공부하며 같은 공간에서 자면서 대화를 나누어야 더욱 돈독해진다는 걸 알아서 둘쨰는 저학년 때 한번 가고 몇 년 뒤에 SAT를 다시 보고 고등학교 때 CTY프로그램을 들어갔다.
아이는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다고 했다. 미국 음식만 먹으니 질려서 햇반과 컵라면등 인스턴트 음식이 필요하다며 긴급 SOS를 쳤다. 급히 먹을 것을 챙겨 아이가 공부하고 있는 프랭크 엔 마샬 대학을 갔다. 아이의 표정을 먼저 살피는데 아이는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주 행복한 표정을 하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러면서 내민 사진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진 속 아이는 눈에는 눈을 보호하는 투명한 안경을 쓰고 손에는 수술용 파란 장갑을 끼고 개구리 뒷다리를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나중에 이 사진은 CTY광고용으로 쓰일 만큼 인위적인 것이 아닌 사실적인 모습으로 해부학 하면서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었다. 일단 안심했다. 해부학이라는 어려운 과목을 들었고 제일 중요한 건 아이가 선택하는 의대로의 첫발이 스스로의 결정이었음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아이의 대학 캠프 생활은 즐겁게 끝을 냈다.
CTY는 아이에게 너무도 중요한 몇 가지를 알게 해 주었다.
일단은 의대를 가고자 하는 희망이 스스로의 결정이었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지금 29살이 되어 홉킨스 성형외과가 된 이 시점에도 스스로의 결정이기에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있었음에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 꿈이 엄마의 꿈이었다거나 집안 대대로 환경에 의해 자신의 결정과는 무관한 일로 떠밀려 간 과였다면 그 안에 겪었던 수많은 난관이 있을 때마다 어찌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나름 학교에서 성적이 좋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CTY에서 만난 친구들이 대단한 걸 보고 세상이 넓다는 걸 알았고 했다. 영국에서 온 여자, 벨기에서 온 남자, 홍콩에서 온 여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남자... 일단 공부에 진심인 아이들이 모였고 해부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진 친구이기도 하고 서로 배울 점이 많은 아이들의 모임으로 3주간 한 공간에서 공부하며 이야기했던 사춘기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훗날 하버드 로스쿨을 가고 예일을 가서 의사가 되고 판사가 되었다. 지금도 좋은 영향력을 주는 친구로 남아 있는 걸 보면 CTY가 준 큰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립학교를 다니던 우리 아이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많이 사립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공립과 사립을 구분하자면 많은 차이가 있는데 먼저 커리큘럼이 다르다. 공립은 전체 아이들의 중간 잠수을 기준으로 잡고 모든 아이들을 그 중간으로 맞추어 짤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고, 사립은 일단 고난한 시험을 통과한 우수한 학생들이 이미 형성되었기에 굳이 낮은 점수에 기준을 맞출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개인의 성향과 학업 성적으로 특화되어 대학까지 맞춤식으로 학생을 이끈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 아이는 공립을 다니다 캠프를 가게 되었는데 캠프를 다녀오자마자 사립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모녀는 이때부터 사립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사립은 일단 합격하기가 어려웠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돈만 내면 받아주는 사립도 너무도 많지만, 아이가 원하는 학교는 미국 사립 랭킹 10위 안에 드는 학교였다. 10위 안에 드는 학교를 조사하면서 느낀 것은 공부는 기본으로 잘해야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처럼 음악이나 미술등 최고 수준으로 과외활동을 해야 하고 재력 또한 만만치 않아야 함을 알았다.
시험도 치르고 바이올린을 당시에는 CD로 녹음하고 재즈 댄스도 비디오로 만들었다. 학교 학생회 일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선생님 추천서도 받았고 중요한 건 에세이를 써야 하는데 학원에서 하는말이 에세이 도와주는데(거의 써준다는 말로 들렸다) $2000을 요구했다. 그때는 돈도 없없지만 기껏 고등하교 사립을 가는데 에세이 한 장 값을 그렇게나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니 한국이나 미국이나 돈만 주면 뭐든지 할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한 10군데쯤 오로지 우리 힘으로 원서를 제출하고 인터뷰를 기다렸다. 그래도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1차 서류 전형에는 합격을 했다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여행겸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일단 동부 쪽에 학교들이 집중되어 있어서 인터뷰 일정을 잡기에는 수월했다.
동부 맨 위부터 차례대로 학교 순례를 하기로 하고 우리는 가벼운 옷차림을 했고 아이는 그래도 인터뷰를 해야 하기에 세미 정장을 하고 작은 아이와 막내 손을 잡고 첫 번째 학교에 도착했다. 그 학교는 사립 고등학교 랭킹 1,2위를 다투는 곳이었다. 학교를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캠퍼스는 웬만한 대학 캠퍼스 못지않게 아름답고 넓었다. 학생들이 대학생처럼 크고 성숙했고 유니폼만 입었지 진한 화장을 하고 넥타이를 맨 남자들 삼삼오오가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자유로운 대학생처럼 너무 밝았다.
우리처럼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 모습에서도 우리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너무도 자유로운 여행객 차림에 막내를 테운 유모차에 반려동물까지 총 출동을 했다. 다른 아이와 부모들은 모두 말쑥한 정장을 하고 우리처럼 아기들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다. 정말 인터뷰만을 위한 자리였다. 특히 아이만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부모까지도 따로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걸 우리는 결코 알지 못했다. 지금도 영어가 힘든데 그 당시의 우리의 모습은 동남아에서 갖 도착한 어리숙한 모습이었으니 미국 문화를 몰라도 한참 몰랐던 시절이다.
그러면서 몇 학교를 더 인터뷰하고 우리는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도착했다. 그러면서 생각되는 것들은 미국에 사는 우리도 이렇게 힘든 일인데 한국에서 어떻게 미국 사립학교를 보낼 수 있을까? 특히 아이만 사립학교에 보내고 부모는 한국에 있다면 그 불안감은 어떻게 감당이 될까? 미국에 살면서 기러기 부모를 많이 만나게 되는데 좋은 결과를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아이로는 가장 힘든 사춘기 시절에 한 부모가 없다는 것은 어딘가 한 곳이 뚫린 어긋난 교육이 될 수밖에 없고 만약 양부모 모두 부재된 환경이라면 더욱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부모님과 함께 아이들이 공부하고 함께 나누는 대화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사립을 보낸다는 것은 일단 부모님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는 일인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희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아이의 자율성을 믿고 맡기며 진행을 했었다. 암튼 집에서 멀지 않은 사립학교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은 건 몇 달 뒤였다. 대학 합격도 아닌데 뛸뜻이 우리 가족은 신났었다. 학비는 그 뒷전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사립학교를 보낼 생각을 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리석은 일인 게 우리에게는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의 아이가 있고 남편이 그 당시에는 사업가도 아닌 직장인이었고 나 또한 집에서 아이만 키우는 가정주부였는데 말이다.
입학하기 전에 학생들과 선생님이 만나는 리셉션에 초대되었다. 리셉션이 끝난 후에는 하루동안 직접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보고 결정을 하라는 편지가 왔다. 잘되었다 싶었다. 그래 일단 하루를 경험해 보고 결정하는 것도 늦지 않을 거야.. 그래도 아이는 나름 멋있는 정장을 차려입고 나는 운전사 노릇이나 해야지 하면서 1시간을 달려 학교에 도착했다. 리셉션까지 데려다주고 차로 올 요량으로 함께 들어서는데 "하이 00" 하면서 어떤 중년 백인이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알고 보니 그 학교 교장이라는데 이미 아이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의 이름을 알고 인사를 했다.
모두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남자들은 한눈에도 멋져 보이는 슈트를 입었고 여자들은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아뿔싸!! 리셉션이 이런 거였구나' 나는 그 길로 아이만 밀어 넣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도저히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동양인에 평상복에 영어도 못 하는 초라한 부모라니... 차 안에서 아이가 모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내내 나 자신을 학대하며 시간을 보냈다.
기다리는 시간이 마치 한 달은 더 된 것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나처럼 말도 못 하는 사슴 가족이 하필 초라하게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와 눈이 큰 사슴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내 눈물과 뒤섞여 당장이라도 떨쳐 버리고 싶었다. 황새 따라가다가 다리가 찢어지겠다는 말도 절로 생각나고 곱게 깎아놓은 유리잔이 그들의 두터운 철갑을 두른 잔이 우리 아이의 초라한 얇디얇은 잔을 툭 쳐버릴 거 같은 불안감도 들었다. 눈물을 훔치는데 드디어 멀리서 우리 아이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나처럼 어깨가 처져 있다. 어쩌지... 순간 눈물이 또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아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는 차를 타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 또한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해서 우리는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