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번 은둔자 The Hermit

진정한 사랑은 홀로 있음으로부터

by 하치


높은 설산 발자국 인적도 끊긴 곳에 홀로 선 은둔자가 있습니다.

세속의 화려함을 등진 은둔자의 바랜 회색옷이 검정과 흰색이 섞여 서로 상반되는 것들의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듯 그는 현실의 모순점에서 더 깊은 합일을 모색하기 위해 홀로 있음을 선택했습니다.


은둔자의 수비학적 의미는 한 자리 자연수 중 가장 큰 수로서 완성과 끝을 의미, 3+3+3으로서 3개 1벌로 된 것끼리의 합이란 뜻에서 이는 나와 너만이 아닌 "우리"를 뜻합니다.

이는 은둔자가 추구하는 바가 단순히 개인의 차원에서 나아가 모두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은둔자가 든 등불 안에는 다윗의 별이라는 육각형의 별이 있는데요.

물, 불, 공기, 흙인 우주를 구성하는 4원소를 나타내는 기호가 모두 포개진 모양과 같으며, 이는 4원소가 한데 갖춰져 있는 것으로서 완벽한 상태로 보아 더할 나위 없는 진리를 뜻합니다.


불 흙 공기 물


<4원소를 모두 포개면 다윗의 별이 됩니다>


은둔자는 눈을 감아 내면으로 시선으로 돌려 오직 이 영적인 빛의 인도를 받고 있어요.


이 카드가 나올 때는 번잡함을 떠나 홀로 있으라는 조언이에요


홀로 있다 보면 자신을 마주하게 되고, 타인이 제시한 정답에 의문을 던지는 기회가 되지요.


사람들은 군중 속에 숨어 획일화된 해답에 안정감을 느끼기 쉬워요.


묻는다는 것은 홀로 선다는 것이고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질문을 위해서는 괴로워해야 하며 방황해야 하며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누구나 쉬운 답을 채택해 개성으로 가장한 인격체로 둔갑해 살 수는 있어요.


그러나 모태정답을 거부한 이상 그는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존재가 되어 모든 이념과 사상의 커넥션을 끊고 홀로가 되고 질문만 남게 되지요.


붓다와 예수는 그의 내부로부터 출발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특별한 관념인 외부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부의 붓다와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차용한 믿음을 투사해 저 밖에 극락과 천국을 만들어내었어요.

마음은 창조를 합니다. 누구든 당장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번뇌로 질주하는 KTX를 만들어 냅니다.


신비주의 시인 카비르는 말합니다.

"가슴이여, 내 가슴이여, 이제부터는 어느 곳으로도 가지 말라. 모든 관념을 멀리하라, 그리고 어서 그대 자신과 마주 서라."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강제로 15년 만두를 먹으며 은둔생활을 했는데도 예전의 터진 입으로 함부로 이죽이는 태도에서 모든 것에 대한 의문으로 진실을 목표로 자신을 단련하고 사뭇 진지해지는 변모를 겪었어요. 그도 그럴진대.

저도 한때 동굴골방에서 한 10년 은둔생활하며 골몰하면서 쑥떡과 마늘빵만 먹어도 인간으로 환골탈태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거슨 사회부적응의 뒷골목으로 새기도 하는 이탈과 도태의 위험이 도사리기도 했습니다만.


은둔자는 보통 사람보다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사회가 주는 인정을 받음에도 뭔가 미진한 찝찝함에 길 없는 길의 여정으로 더 나아가기로 결정한 사람이에요.

모든 배경과 이미지의 탈을 벗어던집니다.


혼돈 속에서 고요히 내면의 폭발을 통해 그는 섬광 같은 깨달음으로 성성한 별이 됩니다.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별


모든 개념과 관념의 묵은 때를 벗기고

은둔자는 순수한 민낯을 회복하여 다시 세상에서 무경계로 살아 것입니다.





타로에서 은둔자는 특정분야의 전문가를 나타내기도 해요.

세상에서 한 계단 한 계단씩 훌쩍 뛰어내 꼭대기를 차지한 사람만을 뜻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세상이 인정하는 커리큘럼을 밟지 않은 재야의 고수이지요.


그들은 많은 것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아요.

대신 간접적으로 가리키기는 합니다.


달을 가리키려 손가락을 까딱입니다.

학생들은 달이 아니고 손가락을 봅니다

그래서 그에게 배우려는 자들은 예수가 말한 것처럼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뺏길 것이다"라는 내면의 경제법칙으로 채점당합니다.

이심전심. 염화미소. 말이 없이 존재로서 삶의 이력으로 가리키는 교수법에 극소수의 사람만이 휘영청 뚠뚠하게 차오른 보름달을 소화해 냅니다.





요즘은 은둔자가 아니라 은둔형 외톨이가 많습니다.

과연 은둔했으니 외톨이일까요?

역설적으로 외톨이가 아니에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이 없네라는 가시나무새 노랫말처럼 시끄러운 자아감을 가졌을 뿐입니다.

외로워질 겨를 없이 내면의 목소리가 시끌시끌할 테니까요.

자기 비하와 남들과의 비교분석, 심심풀이 땅콩으로 깨 먹을 소중한 시간의 순삭으로 앉아있으나 쫓기는 내면의 아우성.


그래서 홀로 있는 것과 혼자 있는 것은 다릅니다.

홀로 있는 것은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기에 나의 거울인 타인까지 감당할 수 있어요.

혼자 있는 것은 그저 형태상 타인의 부재일 뿐 자신의 내면과도 소통불통인 상태예요.


그러나 잊지 마세요.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그 경험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을요.

다행한 소식이지요. 나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 말이지요.

어떤 은둔자는 처음에 은둔형 외톨이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각기 출발선은 달라도 저 정상의 설산은 여전히 자신을 마주할 사람들이 걸어야 할 과정으로서 기다려줍니다.


그는 심심파적으로 시간을 죽이기 위해 타인을 만나지 않고, 살면서 틈틈이 자신을 마주하고, 만나며, 체험하며, 시간을 살립니다.


둥근 쇳조각과 종이다발을 모으고, 필요 없는 것을 위해 모은 것을 던져버리는 시간의 오용을 멈추라고 은둔자는 나직이 말합니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9화8번 힘 Streng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