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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크 남편이 딩크 라이프에 만족할 때

by 하담

15살 많은 전 남자 친구가 계속 다른 남자들을 만나보라고 부추길 때, 나는 그의 뜻대로 다른 남자들과 데이트를 해봤다. 새로운 것, 자극에 쉽게 이끌리던 나였지만, 그들과의 시간은 더 이상 새롭거나 자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 남자 친구와 수다를 떨고 놀고 싶은 마음이 커졌을 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상상력이 풍부한 (N같은)S인지라 그와 결혼까지 생각해 보니, 뭐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매일 지금처럼 아껴주리라 믿었고, 내가 가장 믿기 힘들었던 ‘내가 그를 오랫동안 존경하고 존중하며 살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긍정적인 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 상상되지 않은 것은 우리 둘 사이의 아이였다.


나는 생명을 잉태하고 인간으로 길러내는 그 지난한 과정이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버거웠고, 결국 아이가 없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간혹 "너 닮은 딸, 나 닮은 아들"을 지나가듯 언급하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 청혼한 뒤, "나는 그대와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전 남자 친구와의 의논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통보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자."라며 동의해 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햇수로 12년. 우리 부부는 그때보다 서로를 더 믿고 의지하며, 애틋하고 사랑하고, 안쓰럽고 귀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제야 문득, 아주아주 살짝 ‘아이를 낳고 키워볼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덕질을 하며 그 아쉬움을 달래는데, 의외로 신랑의 경우 딩크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하다.


계엄이 터지고 시위를 다니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꾸만 어려지는 본인의 아버지를 보살피면서 또 한 번 딩크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직접 보살피며 매 끼니, 새로운 죽을 쒀서 대령하고, 젊은 시절 태권도 사범이었던 아버지의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며 "아버지, 식사하실 때도 대련하듯 드셔야 해요!"라며 독려하는 그.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낮 시간을 보내고 내게 돌아와서는 "오늘은 아버지가 혼자 일어나셨어.", "오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엄마 이야기를 하시며 우셨어...", "오늘은 아버지랑 바둑을 뒀는데..."라며 여느 부모들이 자식을 자랑하듯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야. 애를 안 낳기로 한 건 신의 한 수야."라고 말한다. 자식으로서 약해지는 아버지는 보는 게 못내 힘든 모양이다.


자꾸만 어려지는 아버지가 귀엽고, 안타깝고, 응원하고, 감사하고, 특별한 그에게. 나는 속으로 말했다.


'여보가 이렇게 효자일 줄 알았다면, 하나 낳을 걸 그랬다.'




여보, 이 시간은 여보와 시아빠만의 추억이 쌓이는 시간들이야. 현실에 치어, 직장에 치어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진짜 필요하고 살짝은 늦은 감이 있는 시간들. 그럼에도 괜찮아. 살짝 늦었지만 그래도 시아빠는 지금 행복하실 거야. 자신의 아들과 보내는 이 하루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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